예수,코리아 21.12.14 06:26
(딛 3:12-15) “12. 내가 아데마나 두기고를 네게 보내리니 그 때에 네가 급히 니고볼리로 내게 오라 내가 거기서 겨울을 지내기로 작정하였노라 13. 율법교사 세나와 및 아볼로를 급히 먼저 보내어 그들로 부족함이 없게 하고 14. 또 우리 사람들도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준비하는 좋은 일에 힘 쓰기를 배우게 하라 15. 나와 함께 있는 자가 다 네게 문안하니 믿음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너도 문안하라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 거룩한 건축 비전을 가지라 >
필자가 처음 교회를 개척할 때는 꿈과 희망이 넘쳤다. 그때 교회를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는 생각으로 직접 전도하고 열심히 사역하면서 5년쯤 지나면 교회 건축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부흥은 더뎠다. 내면에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있었다. 그러나 교회 건축 비전은 지연되었어도 하나님은 생각하지 못한 다른 곳에서 더 큰 역사를 이루게 하셔서 필자의 달란트에 맞게 문서를 통한 세계 선교 비전을 향해 달려가게 하셨다.
건물만 성전이 아니고 성도 한 사람도 성전이다. 하나님은 성도 한 사람이 교회의 구경꾼이 아닌 교회의 지체와 기둥이 되길 원하신다. 지금은 부족해도 교회의 기둥과 리더가 되는 꿈을 꾸라. “나는 교회의 인물 리더가 될 수 있다. 우리 교회는 한국 교계에 모범 교회가 될 수 있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성전 건축 전에 나 자신이 부실 공사로 쓰러지지 않는 크고 튼튼하고 아름다운 성전이 되도록 기도하라.
목회 초기에는 교회 성장이 더딘 것에 대해 은근히 장소 탓을 했다. 장소가 교회 성장의 중요한 요소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좋은 터를 구하는 것보다 예수님의 터에서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회의 비전에 힘써 동참하면서 개인의 비전에 매진할 때 견고한 교회와 견고한 인생이 된다.
성전 건축보다 중요한 것은 선교 건축이다. 교회를 사랑하는 성도는 항상 내가 섬기는 교회가 커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다. 그 꿈이 이뤄져도 보람이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선교와 나눔의 큰 손이 되는 것이다. 큰 성전은 큰 건물만이 아니다. 나와 내 자녀가 인물 성도가 되면 교회는 큰 성전이 된다. 이 땅의 부자가 아닌 하늘나라의 부자가 많은 교회가 진짜 큰 교회다.
건물은 그 안에 있는 사람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 왕이 있으면 궁궐이 되고 강도가 있으면 강도의 소굴이 되고 성도가 있으면 교회가 된다. 교회에 땅의 가치관에 사로잡힌 다수의 사람보다 내 눈물이 묻고 내 희생이 깃든 자리에서 섬기는 인물 성도가 많은 교회가 큰 교회다. 그런 깨달음이 있기 전까지는 교회 성장이 안 되면 하나님의 선한 섭리를 믿으면서도 은근히 속상했지만 인물 성도 한 명이 중요함을 깨달은 후에는 넉넉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사역에 힘쓸 수 있었다.
< 열매 맺는 자가 되는 길 >
한 사람이 열매 맺는 자가 되면 세상은 조금씩 달라지고 공동체도 점차 힘을 얻는다. 사도 바울이 극심한 시련 중에도 선교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열매 맺는 자를 통해 큰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열매 맺는 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보고 싶은 사람이 되라
본문 12절을 보라. “내가 아데마나 두기고를 네게 보내리니 그때에 네가 급히 니고볼리로 내게 오라 내가 거기서 겨울을 지내기로 작정하였노라.” 아데마는 성경의 다른 곳에는 나오지 않는 음지의 인물이고 두기고는 바울의 선교 여행에 여러 번 함께했고 바울이 디모데를 불러오려고 에베소에 보낸 인물이었다(딤후 4:12). 둘 중에 누구를 디도에게 보냈는지는 알 수 없다. 바울은 디도에게 둘 중에 한 명이 도착하면 급히 니고볼리에 있는 자신에게 오라고 했다.
왜 바울이 아데마나 두기고를 디도에게 보냈는가? 디도가 그레데 교회를 비울 때 둘 중에 한 명이 대신 교회를 돌보게 하기 위해서였다. 디도가 그냥 그레데 교회를 비우면 그 사이에 거짓 교사가 교인을 미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대체 목회자까지 보내면서 디도를 왜 겨울을 지내기로 작정한 니고볼리로 오게 했는가? 마게도냐 서북쪽의 달마디아 선교를 위해 함께 기도하며 선교 전략을 짜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바울에게 디도는 보고 싶고 함께하고 싶은 존재였다. 이상하게 디도와 함께하면 힘과 위로를 얻고 선교 사역에 용기가 생겼다. 그렇게 누군가에게 보고 싶고 함께하고 싶은 대상이 되라. 바울 같은 성인에게도 세세히 따지면 허물과 약점이 많다. 함께 긴밀히 지내면 그런 허물과 약점이 보일 텐데 그렇게 보여도 편하면서 충성스러운 사람은 보고 싶고 만나고 싶고 함께하고 싶다. 함께 있으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큰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그처럼 영혼을 헐떡이게 만들기보다 따뜻하게 만드는 사람이 되라.
가족이 곁에 있어 달라고 하면 피곤하고 바빠도 힘써 같이 있어 주라. 식당이나 카페에 가자거나 드라이브나 여행을 원하면 귀찮게 여기는 대신 고맙게 여기고 같이 있어 주라.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해 달라는 요구를 잘 들어주려면 건강과 기력이 필요하기에 그것을 위해서도 기도하라. 그렇게 사심 없이 곁에 있어 주려고 하면 보고 싶고 만나고 싶고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되고 풍성한 삶의 열매도 많이 맺힐 것이다.
2. 부족함을 채우려고 하라
본문 13절을 보라. “율법교사 세나와 및 아볼로를 급히 먼저 보내어 그들로 부족함이 없게 하고.” 율법교사는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사람이다. 세나는 유대인 율법 교사였지만 복음을 받아들여 바울의 선교 사역에 협력했고 아볼로는 탁월한 성경 지식과 언변으로 아가야와 고린도에서 하나님의 도를 가르쳤었다. 바울은 디도에게 선교지로 파송되어 가는 세나와 아볼로의 필요를 채워 부족함이 없게 하라고 했다.
초대 교회 때부터 선교지로 파송되는 사역자의 필요는 후방 교회가 힘써 채워 주었다. 그처럼 사역자의 필요를 채워서 부족함이 없게 하려면 교회와 교인의 재정 능력이 필요하다. 물론 재정 능력이 있어도 인색해서 드리고 나누고 베풀지 못하는 사람이 많기에 재정 능력과 나누는 심력을 겸비하도록 힘쓰고 기도하라. 왜 경제적인 성공도 필요한가? 교회와 사역자의 필요를 넉넉히 채워서 부족함이 없게 하기 위해서다.
부족함을 채워 주는 삶에는 물질적인 것만 있지 않다. 리더는 팔로워의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고 인내하며 이끌고 팔로워는 리더의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고 인내하며 뒤따르라. 너무 완벽하려고 하지 말고 상대의 완벽을 요구하지도 말라. 리더가 완벽하게 보이려고 하면 위선과 고집을 부릴 가능성이 커지면서 차갑고 매력 없게 보인다. 리더의 부족함이 보일 때 더 채워 주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반전의 리더십을 갖추라.
완벽주의 리더십보다 반전의 리더십을 가지고 겸손한 매력으로 사람을 이끌라. 리더가 허점을 보일 때 팔로워가 그 허점을 메워 주려고 하면 리더십은 더 견고해진다. 팔로워가 리더의 부족함을 채워 주면서 리더의 완성과 함께 자신의 완성을 지향하면 얼마나 복된 관계가 되겠는가? 신뢰 관계가 깊다면 남의 부족함을 보면서 오히려 채워 주고 싶은 마음이 더 생긴다. 그처럼 서로의 부족함을 힘써 채워 줄 때 좋은 열매가 많이 맺힌다.
3. 좋은 일을 힘써 배우라
본문 14절을 보라. “또 우리 사람들도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준비하는 좋은 일에 힘쓰기를 배우게 하라.” 이 구절에서 ‘우리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들인 그레데 교인들을 뜻한다. 바울은 세나와 아볼로의 선교 사역 후원에 디도 외에 그레데 교인들도 동참하길 원했다. 바울은 선교 사역자의 필요를 채우려는 일을 ‘좋은 일’이라고 표현하며 그 좋은 일에 힘쓰기를 배우게 하라고 했다.
교회에서의 헌금이나 선교 사역 후원은 적선하는 것이 아니라 사역에 간접적으로 동참하는 것이다. 교회 리더가 노골적인 돈 얘기로 교인들의 주머니를 털어 자기 배를 불리면 결코 안 되지만 헌금하고 후원하는 삶 자체는 힘써 가르쳐야 한다. 그처럼 헌금이나 후원도 좋은 일이지만 그 외에 수많은 좋은 일들을 계속 배우라. 학교에서는 졸업해도 배움에서는 졸업하지 말고 계속 배우려고 하라. 인생은 끊임없이 배우고 성숙해지는 과정이다. 좋은 일도 더 좋게 만들려고 힘쓰라.
유머 중에 수준 낮은 유머가 많다. 타인 감수성을 가지고 유머 수준도 높이라. 단체 경기에서 자기 쪽으로 오는 공이나 선수를 막지 못해 점수를 먹게 하는 사람이 있다. 예를 들어 족구나 배구에서 어떤 선수에게 공이 가면 그 선수 때문에 점수를 먹는다. 그때 유머로 그에 대해 “구멍이야.”라고 한다. 그러면 처음에는 모두가 악의 없이 웃어도 계속 그 소리를 들으면 점수 먹게 하는 당사자는 점차 유머가 아닌 상처로 받아들인다.
구멍 역할을 하는 사람에게 유머로라도 “구멍이야.”라고 하지 말고 “힘내세요.”라고 하라. 계속 격려하면 힘내어 게임에 참여하고 동료 의식이 높아지면서 다른 참여도 잘하고 다른 일도 잘 협조하면서 공동체에 좋은 열매가 맺힌다. 힘을 빼는 수준 낮은 유머를 지양하고 힘을 주는 수준 높은 유머를 지향하라. 유머 쓰는 것 하나도 타인 감수성을 발휘하는 성숙함을 얻도록 계속 자라 가라. 또한 어느 분야에서든지 나이를 거스리지 않으면서도 할 수 있는 한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려고 하라.
4. 은혜가 있는 사람이 되라
본문 15절을 보라. “나와 함께 있는 자가 다 네게 문안하니 믿음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너도 문안하라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사도 바울은 편지 말미에 자신과 동역자의 마음을 담아 문안하면서 디도에게 “너도 문안하라.”라고 권면했다. 그처럼 좋은 말로 서로 평안을 빌어 주라. 그런 복된 존재가 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은혜이기에 바울은 은혜를 빌어 주는 축복 기도로 편지를 끝냈다.
주일 예배 후 “오늘 말씀에 많이 은혜 받았어요.”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은혜를 주중에 삶으로 넘치게 표현해 내는 것이다. 은혜가 넘치는 사람을 영어로는 graceful이라고 표현하는데 그 단어가 실생활에서는 ‘우아한, 품위 있는’이란 뜻으로 변형되어 사용된다. 우아하고 품위 있는 사람은 우아한 옷과 명품을 걸치고 고급 차를 타고 우아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은혜가 넘치는 사람이다.
특히 은혜롭게 말하면 더 우아하고 품위 있게 된다. “은혜 받았어요.”라고 말한 후 저차원의 언행을 보이는 것은 진짜 은혜 받은 모습이 아니다. 은혜가 넘치면 교양과 도덕과 윤리 문제에서도 수준이 높아진다. 평소의 언행이 비상식적이고 비윤리적인 이단 교주의 “믿음은 교양이 아니다. 기독교는 윤리가 아니다.”라는 말에 현혹되지 말라. 바른 성경적인 믿음을 가졌다면 도덕과 윤리에서도 수준이 높아져야 진짜 은혜를 받은 모습이다.
또한 은혜롭게 살라는 말은 기적적인 은사를 많이 보여 주라는 말도 아니다. 기적적인 은사를 많이 보여도 교양과 품위가 없고 헌신할 줄 모르고 교회 직분과 자리에 집착한다면 은혜를 받은 모습이 아니다. 교회에서 은혜롭게 나눌 때 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자리와 직분에 집착하지 않을 때 더 자리와 직분이 주어지는 은혜가 있다. 그런 반전의 은혜를 추구하라. 성령 충만을 오해하지 말라. 성령 충만하다면서 은혜롭지 못한 모습을 보인다면 모순이다. 은혜로운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은 아닐지라도 성령 충만한 사람은 은혜로운 사람이다.
< 참된 성령 충만을 추구하라 >
예전에 치유 집회를 이끄는 한 부흥사의 중매로 젊은 남녀가 결혼하게 되었다. 그런데 결혼식장에서 그 부흥사가 자기가 중매를 했다고 결혼 축의금을 사전 협의도 없이 강탈하듯이 다 가져갔다. 은혜가 없는 행동이다. 그처럼 예전에는 성령 충만을 내세워 비상식적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부흥사가 많았다. 성령 충만하면 더 은혜로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 성령 충만하면 더 이타적이고 따뜻해져야지 더 이기적이고 차가워지면 안 된다. 사람을 따뜻하게 해 주는 참된 성령 충만을 추구하라.
한 부녀는 자주 포옹을 했다. 어느 날 포옹할 때 딸이 말했다. “아빠, 허그하는 것은 사람을 따뜻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아빠는 딸과 포옹할 때 종종 기도했다. “하나님! 저는 딸을 지켜 줄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켜 주소서.” 또한 포옹할 때 딸의 맥박 소리를 들으면서 생명력과 활력을 느끼고 힘을 얻었다. 그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따뜻하게 안아 주라. 몸으로 안아 줄 수 없는 관계라면 마음으로 안아 주라. 그처럼 남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고 기도해 주는 은혜가 넘치는 사람이 되라.
예전에 한 교회에 60대 중반의 집사가 등록해 묵묵히 충성했다. 얼마 후 교회에 큰 시련이 닥치면서 소수의 교인만 남았다. 그래도 그 집사 부부는 떠나지 않고 충성했다. 그 후 그 가정의 사업이 무너져 교회에서 1시간 30분 떨어진 시골로 이사 가면서도 교회를 떠나지 않고 한 번도 주일을 어기지 않고 지키면서 충성했다. 그러면서도 매달 헌금을 상당히 했다. 그 헌금을 볼 때마다 담임목사는 기쁘면서 마음이 아팠다. 그 헌금이면 시골로 이사 갈 필요 없이 교회 근처에 집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집사는 오랜 세월을 묵묵히 교회를 섬겼고 담임목사의 매일의 묵상 글을 7년 이상 하루도 빠짐없이 줄을 치고 문제를 풀어가고 읽으면서 은혜를 받았다. 담임목사는 그의 수고가 명예와 자리를 얻기 위한 계산적인 수고가 아닌 것을 알았다. 그래서 오랫동안의 수고에 대해 이 땅에서도 작은 보상을 주고 싶었고 세상을 떠나면 묘비나 납골함에 ‘아무개 장로’라는 명칭이라도 쓰게 하고 싶었다. 그 문제를 위해 그 집사가 교회를 등록하고 10년이 지난 시점부터 장로 피택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렇게 3년쯤 기도하던 어느 날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다. 그 교회가 속한 교단은 목사와 장로의 정년이 없는 교단이었기에 70세가 넘어도 장로 임직이 가능했다. 70세가 넘으면 다른 교단이나 교회에서는 은퇴하기에 보통 장로 피택을 하지 않지만 그 교회 담임목사는 교회에 헌신한 세월이 15년이 넘고 70세가 넘으면 장로 피택 자격을 주고 3분 2 이상의 성도가 찬성하면 피택하라는 마음의 감동을 받았다. 그러면 그의 장로 피택 제안을 성도들도 기쁘게 동의할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교단에 그 의향을 전하자 사무총장도 기쁘게 동의했다. 전 과정이 은혜롭게 되어서 담임목사는 기쁘고 들뜬 마음으로 그 의향을 피택 몇 달 전에 그 집사에게 알렸다. 그런데 그 후 피택 며칠 전에 그가 말했다. “목사님! 아직 부족한 것이 많아 나중에 장로 직분을 받고 싶습니다.” 진심인 것 같았다. 담임목사는 그 말을 듣고 그 사양하는 모습을 하나님이 감동하실 것 같아서 더 기뻤다. 또한 그 모습이 성도들에게 좋은 교훈이 될 것 같아 그 전 과정에서 아름답고 멋지게 역사하신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렸다.
명예심을 버린 최상의 헌신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라. 이 땅의 복과 소유와 명예와 자리에 연연하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순수하게 교회를 섬기면 이 땅에서도 보상의 때가 오고 혹시 이 땅의 보상이 없다면 천국 보상은 더욱 찬란할 것이다. 그렇다고 천국의 보상을 더 얻겠다는 계산으로 이 땅의 보상을 거부하지는 말라. 어떤 상황에서든지 보상을 얻을 생각은 버리고 더 헌신하려는 생각만 하라. 그러면 하나님이 더 기억해 주실 것이다. 늘 은혜로운 삶으로 더욱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예비하라.
- 주일설교(21.12.12) -
ⓒ 이한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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