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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교육정책

공부하는 그리스도인(The Outrageous Idea of Academic Faithfulness) - 도널드 오피츠, 데릭 멜러비

Book 옮겨적기

                                                         stella         2018. 12. 24. 18:11

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isabr&logNo=221426301472&navType=tl

 

그때도 남은 거들떠보지 않고 공부만 하는 이기적인 학생들이 있었고, 주님만 바라보고 공부하지 않는 평안하고 게으른 학생들도 있었다. 

 

신실하게 학업을 하라. 그래, 이기적으로 학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 하듯, 신실하게 학업을 하라. 

 

이 책의 핵심 주장은 "하나님의 우리의 학업에 지극히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사는지를 끊임없이 지켜보시고, 훈련의 과정인 대학에서의 교육, 즉 학업에 지극한 관심을 갖고 계신다. (대학의 중요성)

 

 저자들의 주장처럼 그리스도인 학생들이 추구해야 할 가치는 바로 '신앙과 학문의 통합'이다. 

그러나 이 말은 학문을 뭔가 기독교적으로 만들라는 말이 아니다. 기독교적으로 하는 축구, 기독교적으로 만든 김밥이 말이 되지 않듯이, 신앙과 학문의 통합은 제3의 무언가를 만들어 내라는 의미가 아니다.

대학생들에게 해당되는 '신앙과 학문의 통합'은, 대학에서 가르치는 세속 학문을 배우되 성경적 시각을 갖고 비판적으로 수용하라는 의미에 가깝다. 

그러나 삶의 문제를 다루지 못해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 버리는 양육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싫든 좋든, 학업은 당신의 삶에서 핵심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학문에 대한 기독교적 관심을 정립하는 것은 신앙을 표현하는 중요한 통로가 된다. 

 

1. 전혀 새로운 세상을 만나다

   우리를 목표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것은 죄다 불길 속에 던져 버려라. 

오로지 창조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데만 집중한다. 바울의 말에 따르면,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한다.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으라."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다르게 생각하라고, 다르게 살라고 권면하고 있다. 

기대감은 중요하다. 또한 우리의 기대감은 변해야 한다. 우리를 둘러싼 세상의 힘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아주 작은 물고기에 불과한 우리가 과연 이런 흐름에 맞설 수 있을까?

- 자유에 집착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학생 문화

- 자기 개발에 대한 욕구

- 또래 집단의 압력

- 교회의 반지성주의 풍토

- 대부분의 대학에서 견지하는 세속적 전제들

 

2. 바벨론 U

   폭력과 학대가 만연하고 학업 성취도보다는 힘자랑하는 무용담이 더 칭송받으며, 책임 있는 행동을 가르치는 교육보다 신분 상승을 위한 교육이 환영받는 것은 뭔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뿐만이 아니구나)

 

대학에서 무엇을 배우고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다. 복음으로 마음이 새로워지고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 삶이 변화되지 않으면, 당신은 그저 주변 문화를 따라갈 수박에 없다. 

 

이들은 작은 일에 충성하고, 하나님의 공급을 신뢰했다. 

 

한밤중에 기습공격을 하거나 쿠데타를 도무지 않았고, 느부갓네살 왕과 그의 정책을 비난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 이들이 한 일은 무엇인가? 그들은 조국을 멸망시키고 성전을 더럽힌 나라를 위해 일했다. 이 네 명의 유대 청년은 부당한 요구 앞에서 담대하게 평화 저항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그러기 전까지는 자신의 지혜를 발휘하여 하나님이 허락하신 문화적인 상황 가운데서 열심히 일했다. 

 

우리는 우리가 받는 우리가 받는 교육을 잘 선별하여 불순물을 걸러내고 순금만 남겨야 할 것이다. 

자연계와 인간계, 각 학문 분야에 대한 중요한 통찰은 대개 기독교적 관점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에게 힘입은 바가 크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고등 교육을 받을 기회를 주셨따면, 날마다 감사하라. 마음을 새롭게 하고 지혜를 키우라. 

 

3. 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 

   (꼭 헬렌켈러가 설리반 만나듯, 그렇게 극적으로 효과적이고 감동실화가 아니라 한들, 우리의 역할을 충분히 잘 감당해 내는 것만 하더라도... 누군가의 사회화과정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이는 모두 중요하다.)

 

세계관은 철학처럼 체계가 잘 잡혀 있지도 않고 말로 설명하기도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의 세계관에 의문을 품는 경우는 흔치 않다. 

 

만일 전구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면, 깨진 조각을 보고 전구를 떠올리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체 그림을 알면 부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학문 연구도 대개는 전체에 속한 조각과 파편을 공부하는 것이다. 

 

성경적 세계관은 모든 실재를 성경 이야기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기본 방식이다. 

 

4. 이야기 구조의 삶

   하나님은 좋은 이야기를  즐기신다. 아름답고 순수한 창조 세계를 만드시고 역사 가운데 인간으로 하여금 돌보게 하신 이유가 달리 있겠는가?

그것도 좋은 방법이기는 하나, 훌륭한 학생은 성경을 이야기(논픽션)로 읽고 그 대서사시의 모험에 뛰어든다. 현명한 친구와 멘토의 도움과 독서를 통해, 나도 성경 문맥에 따라 본문을 해석하고, 성경의 궁극적인 이야기에 비추어 설교하며, 학문을 그 이야기에 부속된 이야기로 보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다. 

 

근대성이나 탈근대성은 딱 떨어지는 일정 기간(근대는 1500년에서 2000년 사이, 탈근대성은 아직 진행중)보다는 서구 사회의 정신과 문화를 묘사하는 표현이다. 

근대성은 우리 시대의 문화를 형성한 이야기였다. 이것은 창조 이야기가 아니라 물질 이야기다. 근대성은 타락(죄) 이야기가 아니라 무지의 이야기이고, 구속 이야기가 아니라 인류 진보의 이야기이다 근대성의 이야기 틀(물질-무지-진보)은 아주 강력해서 기독교 이야기를 신봉하는 사람들조차 근대성의 신화대로 사는 사람이 많다. 너무나 오랫동안 근대의 전제 아래 살았기에 그것이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고 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당연하게 전제한다.  

 

5. 물고기 눈 학습

    기독교적 지성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어하는 게을러터진 비만 환자와 같다. 운동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 기독교적 지성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같은 질문을 조금 다르게 표현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 기독교적 관점의 독특한 점은 무엇인가?

- 기독교적 사고와 지식의 기독교적 목적이란 것이 명시적으로 존재하는가?

-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남들과 다르게 사고하거나, 사물을 다르게 보는가?

- 전공이나 수강 과목을 바라보는 독특한 기독교적 관점이 있는가?

 

성경은 지성이 중요하며, 우리의 사고방식 가운데 특정한 패턴과 우선순위를 개발해야 한다고 분명히 말한다.

각 사람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롬12:2)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고후10:5)

              모든 일을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골3:17)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해야 할"(마6:33) 책임이 있다.

철저한 기독교적 지성이나 학문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을 개발한다고 할 때는 이런 구절들만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와 청지기 의식, 제자도처럼 성경 전체에 드러난 주제들을 연구해야 한다. 그런 신학을 통해 우리는 지식과 기독교적 지성이 다른 신앙 분야와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발견할 것이다. 온전한 지식은 '행동하는' 반응도 포함한다.(교육을 공부하는 우리에게 '행동하는' 반응은 어떤 것이 있을까?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 뿐만이 아니라, 교육의 정신을 모든 대인관계에서 모든 상호작용에서 지혜롭게 녹이는 것등이 있을 것 같다. 수시로 배려하고, 모든 발언에서 상대의 감정을 고려하는 것 등, 그리고 모든 의사결정에서 상대방의 성장을 진정어린 마음으로 응원하는 것 등..)

 

기독교적 지성은 독립된 개체가 아니다. 실체가 없는 지성이 아니란 말이다. 기독교적 지성은 항상 관계 속에 있으며 관계를 통해 형성된다. 

우리의 정체성과 소명을 이해하려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해야 한다. 기독교적 지성은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 발달하는데, 그 하나님은 창조세계와 성경의 계시, 살아계신 말씀이신 예수님과 성령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셨다. 

 

우리가 하는 일, 연구실이나 강의실은 물론 본인의 사고방식에서도 지혜와 긍휼과 정의와 신실함이 결여될 때가 만다는 사실을 고백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을 지금 당장 바로잡을 수도, 또 완벽하게 바로잡을 수도 없다. 기독교적 관점은 하루아침에 개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평생 죄의 파괴력과 싸워야 한다. 다양한 학문 분야를 왜곡시키는 비성경적 사상과 이론들에 맞서는 것은 우리의 학문적 과제 중 하나다. 

 

한쪽 눈은 성경말씀에, 다른 한 쪽 눈은 당면한 문제에 두라. 그런다고 해서 사시가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똑똑히 사물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6. 4I 학습

    Integration : 통합 <-> 창조

    Idolatry : 우상 <-> 타락

    Investment : 투자 <-> 구속

    Imagination : 상상력 <-> 회복

 

진정한 그리스도인 학생과 학자가 되고자 하는 이들에게 통합은 끊임없는 과제다. 우리는 본인의 신앙을 성경의 증언과 통합하기 위해, 우리의 행동을 말과 통합하기 위해, 학문적 성과를 신학과 통합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성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실함과 섬김을 표현하기 위해 공부하고 일한다. 

 

그리스도인이 삶이 중요하다고, 창조 세계가 삶의 번영을 위해 계획되었다고, 하나님이 이 세상의 삶을 소중히 여기신다고 믿게 되면, 일을 비롯하여 우리가 하는 모든 것에 대한 투자가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다. 

 

샬롬의 관점에서 볼 때 상상력은 학문에서 중요하게 부각된다. 우리의 상상력은 자아실현이라는 현재의 열망과 꿈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현재의 존재 방식을 넘어 앞으로 될 존재방식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새로워진 상상력에 소망이 덧입혀지고, 이 소망이 기도 가운데 드러나며, 이것이 긍휼과 용기를 삶에 밀어 넣는 헌신으로 나타나야 한다. 

예언자들은 현실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의 상상력이 있었기에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다. 하나님이 당신의 가족과 학교, 교회, 직장을 어떻게 바꾸고 싶어 하실지 상상할 수 있겠는가? 성령께서 우리를 불러 "더 깊이 들어가라"고, 고정관념을 깨라고, 하나님의 세상을 회복하는 일에 창조적으로 협력하라고 하시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당신은 그리스도 한 분만을 주님으로 따르기로 작정했는가? 그분이 당신의 학업에 진지하게 관심을 갖고 계신다는 사실을 느끼는가?

하나님 나라로 초청한다는 것은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를 실천하고 하나님의 세상에서 기쁨과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죠. 

 

7. 무모한 생각의 구체화

   독서를 통해 배우기 좋아하는 사람들도 읽은 내용을 실천함으로써 유익을 얻는다. 

우리는 새로운 사상을 만나고 깊이있는 토론도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신실함을 구체화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한다. 성경이 말하는 지식에는 배운 것에 대한 반응도 포함된다. 정말로 안다는 것은 단순히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해에 기초하여 행동하는 것을 뜻한다. 

 

예수님과의 관계는 기분에 좌우되어서는 안된다. 다른 모든 관계처럼, 그분과의 관계 역시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자라게 마련이다. 우리는 교회에서 예수님과 시간을 보낸다.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는 곳이 바로 교회다. 

 

기도는 위로 맺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인데도 흔히들 무시하기 쉽다. 초자연적 실재를 믿는다는 그리스도인들조차도 그런 존재와 상관없이 살아가며, 기도가 정말 효과가 있는지 의구심을 품는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자주 있다. 기분 좋을 때는 감사기도를 드리고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는 하나님의 인도를 구한다. 

 

일주일동안 기도실험을 한번 해보겠는가?

당신의 교수님과 과 친구들, 관심있는 연구 주제를 위해 기도하고 지혜를 구하라. 정기적으로 나가는 기도 모임이나 성경공부 모임이 있다면, 학업을 진지하게 대하게 해달라고 기도를 부탁하라. 수업 시간 직전에 기도하고, 과제를 하기 전에 기도하라 우리는 눈에 보이는 작은 일을 실천하는 것이 학문적 신실함의 여정에서 좋은 출발점이 된다고 믿는다. 

 

하나님이 저를 이 대학과 전공, 이 수업으로 부르셨음을 믿습니다. 거짓을 가려내고, 가치있는 통찰을 발견하며, 겸손하게 기여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하나님의 세상을 배워 가는 동안 지혜를 주시기를 구하니다. 공부하는 동안 저를 지켜봐 주세요. 이곳에서 하는 공부가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 데 준비되는 과정이기를 원합니다. 

 

존 스토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집중해서 들으라고 권면하는 내용의 책을 썼다. 그중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기독교 제자도에서 가장 중요한(동시에 사람들이 가장 무시하기도 하는) 요소는 경철하는 귀를 개발하는 것이다.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결코 훌륭한 제자가 될 수 없다."

경청하지 않는 사람은 좋은 학생이 되지 못한다.

좋은 학점을 받으려면 시험에 뭐가 출제될지 수업 시간에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단 소리가 아니다. 훌륭한 학생은 수업 내용을 듣고 행간의 의미를 읽어낸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충실히 따르려는 그리스도인 학생이라면 나머지 공부가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존 스토트는 학생들에게 "이중적 귀 기울임"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말씀과 세상에 동시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예수님은 총 감독이실 뿐 아니라 설계자와 건축가시요, 우리가 열심을 다하는 이 프로젝트를 완성하실 이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리스도인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집중해서 깊이 파헤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훈련이다. 

 

굳은 땅에 구덩이를 깊이 파 본 사람은 알겠지만, 제대로 파려면 천천히 땅을 파야 한다. 땅 파는 일은 누가 먼저, 제일 깊이 땅을 파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런 속도전은 10분이면 물집이 잡히고, 20분 후에 탈진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학문 세계를 파는 일도 마찬가지여서 시간이 흐르면 구덩이 옆에 제법 쌓인 흙더미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기도와 집중, 연구를 훈련할 때 꾸준히 자기 속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세워지지 않는다. 신실한 그리스도인 학생도 하루아침에 탄생하지 않는다. 

 

물론 강의실에서 그리스도를 대변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고, 그리스도인 대학생들의 용기가 시험을 받는 상황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과 강의실에 있는 다른 학생들을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복음을 위해 인내와 겸손을 훈련해야 한다. 기도하고 수업 시간에 집중하며 좋은 질문을 던지는 법을 배워라. 그리고 쉬어라. 끈기를 가져라. 조용히 자신감을 키워라. 그러다가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를 증거할 기회를 잔뜩 부어 주신다 해도 놀라지 말라. 

 

8. 미끄럼틀과 사다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걷기에 가깝다. 코스케 코야마는 '시속 3마일 하나님: 성경적 고찰'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시속 3마일이면 가볍게 걸으면서 기분 좋은 대화를 나누기에 적당한 속도다. 시속 3마일은 하나님은 늘 걸어서 이동하시는데, 제자들이나 노정에서 만난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하며 걸으신다. 아직도 예수님은 시속 3마일의 속도를 즐기신다. 그분은 이처럼 아주 인간적인 속도로 우리를 알고 싶어하시고, 우리 역시 똑같은 속도로 다른 사람들과 최상의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우리가 사방팔방 뛰어 돌아다닌다면 풍성한 관계를 기대하기 힘들고, 돌아다니지 않고 한 자리에만 있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는 서로가 올바른 방향으로 향하도록 지켜봐 주고, 결국에는 거북이가 옳았다는 거슬 상기시켜 줄 필요가 있다. 신실함을 유지하는 데는 조금 느려도 꾸준한 것이 최고다.

 

Q 좋은 이야기 감사합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달라졌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시간을 내서 제가 배우는 것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기 시작했어요. 우선, 종교과목 예로 들어볼게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왜 그 종교를 믿으며, 저는 왜 기독교를 믿는지 생각해 봤죠.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흥미로운 대화가 많이 나왔어요. 또 문학시간에 에세이 주제를 선택하면서는 신앙과 믿음, 가치관과 관련된 주제들을 살펴보았어요. 의미있는 주제로 글을 써 보고 싶었거든요. 생물학 시간에 진화 이론을 배울 때는 지적 설계이론의 가능성에 대해 질문을 던졌어요. 그랬더니 나중에 줄기세포 연구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에, 교수님이 기독교 신앙은 이 문제에 어떤 입장이냐고 제게 물으시더군요. 교수님은 제가 무슨 전문가라도 되는 양 정중하게 대해 주셨어요.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면서 무척 당황했지만, 그 교수님의 질문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현대의 여러 문제를 생각하는 저의 방식에 기독교가 영향을 미쳤다는 증거를 제시하려고 노력하게 되었어요.(우리가 생각하는 사회문제, 현상등에 있어 우리가 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 우리의 가정을 아는 것이 필요)

 

TV 드라마 이야기 대신 옛 이론이나 최신 과학기술이 미치는 영향으로 대화의 방향을 선회하려면, 추가 연구 시간이 아니라 열정과 실천만 있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이제부터 할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당신은 일종의 복수 전공을 해야 한다. 학문을 제대로 공부하려면, 당면한 주제는 물론이고 이 주제를 이미 살펴본 기독교 학자들의 연구와 성경도 살펴보아야 한다. 수업 시간에는 기독교적 관점을 소개하거나 기독교 저술을 교재로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 일은 오롯이 학문적 신실함을 진지하게 여기는 소수의 그리스도인 친구들과 당신의 몫이다.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100년 가까이 반지성적인 성향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좋은 소식도 있다. 여러 학문 분야에서 신중하고 용감하게 기독교적 학문에 관여해 온 그리스도인들도 있기 때문이다. 훌륭한 그리스도인 교수들이 미 전역의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는데, 이중 교수직을 소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늘고 있다. 이들은 연구 분야의 해당 사실을 밝힐 뿐 아니라 그 사실에 의미를 불어넣는, 신앙 중심의 틀을 제시한다. 훌륭한 그리스도인 학자들은 저술 활동에도 열심인데, 갈수록 더 많은 그리스도인 학자들의 책이 오늘날 학계에 중요하게 기여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바흐는 작곡한 곡마다 악보에 S.D.G라고 서명했는데,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뜻의 Soli Deo Gloria의 약자였다. 바흐는 교회음악과 대중음악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모든 작품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애썼다. 

 

웬만큼 글을 쓰는 학생들 중에는 글쓰기 재능이 특출한 학생들도 있다. 그런 학생들은 삼중 독자를 염두에 둔 글쓰기를 훈련해야 한다. 가장 먼저, 주어진 과제 자체에 집중해야 한다.

  당신의 1차 독자 대상은 교수님이나 특정 질문 혹은 주제다.

어떤 주제를 기독교적으로 검토한답시고 주어진 주제를 벗어나 엉뚱한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주제를 적절히 다루는 글은 아주 기초적인 수준에 불과하다. 

  당신의 2차 독자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주님이 당신 글을 보고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말씀하실 수 있을 만한 글을 써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서교나 신학 논문을 쓰라는 소리가 아니다. 당면한 주제를 깊이있고 신실하게 검토하는 것과 함께, 그 주제에 대한 당신의 견해와 신앙적인 관점이 글에 드러나야 한다는 뜻이다. 정확히 어떤 내용을 써야 하는지는 전공 과목이나 주제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만, 전반적인 구성을 위해 다른 학생들이나 멘토의 도움을 받게 될 공산이 크다. 

 

좋은 글을 나누는 것은 학문세계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이기도 하거니와, 공공의 목소리를 내기 원하는 학생들에게는 훌륭한 연습이 될 수 있다. 

 

개인의 꿈과 야망이 창조 세계를 회복시키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목적과 연결될 때에야 비로소 궁극적인 만족을 얻을 수 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의 경우에는 그랬다. 

(창조세계의 회복을 위해 내가 하면 안될 일들은 무엇인가?)

 

이런 일들이 소홀히 여겨지는 이유는 그리스도인 학생들이 이러한 문제들이 개선될 수 있으리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힘든 일에 발을 들여놓기를 꺼린다. 성공 여부가 불투명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공은 우리 몫이 아니니 그저 신실하기만 하면 된다고 서로를 격려한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그분의 때에 완벽한 성공을 불러오실 것이다. 

 

교과서와 기독교 서적을 똑같이 늘 탐독해야 합니다. 교과서를 보면서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가진 신앙이 지금 읽고 있는 내용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라고 말이죠. 

처음에는 좋은 책을 읽으면서 질문거리를 많이 만들었어요. 열심히 공부하고 어려운 질문을 던질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깊이 생각하고 의미있는 말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얼마나 만족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결단력 있는 순종뿐 아니라 기쁨과 놀라움, 호기심과 긍휼도 원하신다. 

 

나는 그곳에서 내 인생을 변화시킨 사람들을 만났고, 내 인생을 변화시킨 활동들에 참여했으며, 내가 진심으로 고맙게 여기는 관점과 능력과 관계들을 개발했다. 

당신이 어떤 결정을 하느냐에 따라, 학업에 어떻게 투자하느냐에 따라, 유익한 체험과 깊이 있는 배움이 뒤따를 것이다. 대학이라는 모험에 뛰어드는 당신이 여호수아와 갈렙의 본보기를 따르기를 바란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런 반대 의견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더 의지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올라가서 그 땅을 점령합시다. 우리는 반드시 그 땅을 점령할 수 있습니다."

약속의 땅만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의 것인데, 거기에는 대학도 포함된다. 당신은 선교지를 보냄받았다. 

당신도 메뚜기 같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겠지만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오래전 여호수아와 갈렙이 그랬듯이 하나님의 약속과 공급을 기억하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늘 좋게 보고하라. 

 

또 하나님은 당신이 어디로 가든지 당신과 함께하시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다. 

 

학생설문조사

 학문적 신실함에 방해가 되는 가장 큰 요소는 무엇인가?

1. 시간 관리 능력의 부재

2. 너무 바쁘다. 페이스북 같은 인터넷 커뮤니티는 중독성이 아주 강하다. 

3. 수업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4.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괴롭힘 당할 것이 두렵다. 

5. 나 자신의 반지성주의

6. 신앙의 구획화

7. 이력서의 압박. 나에게 맞는 직업을 구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너무 심하다. 

8. 학문적 신실함을 실천하는 본보기가 부족하다. 

9. 게으름. 미루는 게 일이다. 

10. 중요성을 공감하지 못하겠다. 

11. 학교에서 다른 할 일이 너무 많다. 

12. 교수 혹은 과목이 맘에 들지 않는다. 

13. 친구들 때문에 힘들다. 친구들도 상관 안하니 나도 상관 안한다. 

14. 죄 때문이다. 그래서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뭘 해야 할 지도 잘 모르겠다. 

15. 성적. 학문적 신실함보다는 성적이 중요하다. 

16. 흔해 빠진 부정행위. 시험 감독관을 속이기는 식은 죽 먹기다. 

17. 내가 맞서야 할 도전이 두렵다. 

 

부록

 

1. 신앙 생활의 핵심은 왕성한 종교 활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에 진리가 분명하게 확립되는 것에 있습니다. 

   어떤 영역에서 어떤 일을 하며 살든지 더 우월하거나 열등한 삶이란 본질적으로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목사나 선교사가 되거나, 학자가 되거나, 직장인이나 연예인, 청소부가 되는 것은 각자의 사명에 속하는 것일 뿐 그 중요도와 가치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으며, 하나님의 주권과 말씀이 삶에서 얼마만큼 인정되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김군이 적어도 단단한 식물을 먹을 정도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오늘날의 교회 모습만을 살필 것이 아니라, 오늘날과는 전혀 다른 종교개혁 시대의 교회 모습을 깊이 검토해보는과정이 필요합니다. 

 

특별히 한국 근현대사는 일제 수탈과 분단, 전쟁을 비롯하여 급격한 자본주의 사회로의 전환, 민주화 운동에 이르기까지 변화와 질곡의 사건들이 많습니다. 우리 사회는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 위에 형성되었습니다. 역사 앞에서 오늘은 반추하지 못한다면, 이는 게으름이요 우둔한 삶의 반복일 뿐입니다. 

 

2. 새로운 배움 앞에서 우리는 역사적, 사회적 문제들을 당연시하던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적어도 주기도문으로 기도를 하는 사람이라면 신앙의 양심으로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 알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기 위해 우리는 공부의 개념을 확장하고 더 나아가 공부의 개념을 전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입주 위주의 공부 개념을 모든 배움의 과정으로 확장해야 합니다. 

세상 어디에서든지 배우는 자세로 있는 것은, 일상 생활에서 성찰과 분별을 통해 하나님 나라 운동을 지속적으로 해나가기 위한 첫 걸음입니다. 

 

3. 더불어 살아가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나와 너를 살리는 참 공부입니다.

   지식과 정보의 축적을 위한 공부에서 공유를 위한 공부로 전환이 필요합니다. 

세상에는 조금 더 유력해지기 위해 공부를 하는 이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당장 도움이 되지 않는 공부를 하는 이들은 그만큼 적겠지요. 

"고민 없는 젊은 젊은이 아니고 젊은 고민은 인생의 문을 열어준다"고 합니다. 대학 시절은 이전에 살아 왔던 방식을 깨치고 무엇을 위해 살 것인지를 고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때에 맞는 공부가 여러분의 삶에 새로운 문을 열어 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수업 분위기와는 별개로 신앙과 학문의 통합된 관점을 갖는 훈련들이 지금의 내 신앙의 정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철학과 사회학, 인문학 고전들과 전공 분야의 책들을 비롯하여 한국사회의 정치사회적 이슈를 다룬 책들까지 두루 읽었는데, 그때부터 대학생으로서 캠퍼스와 한국 교회, 나아가 한국 사회를 이해하고 사회참여를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게 되었다. 

 

4. 실천적 지성을 훈련하라.

   지적 탁월함을 쫒다 보면 자신의 인격이나 실천성과는 무관하게 유희적인 차원에 머무르게 되는 수가 많다.

노엄 촘스키나 제레미 리프킨 같은 실천적 지식인을 본으로 삼으라.

또한 지식을 자랑하기에 앞서 주변에 가까운 이들이나 어려운 이들에게 작은 것부터 몸으로 섬기는 일에 더욱 열심을 내자. 

 

5. 진로를 정하면 최소 2년은 매진하라.

   나는 회사에 들어간 첫날부터 후회가 밀려왔다. 다른 일이 더 좋아 보였고 지금이라도 당장 그만둬야 하는건 아닌지 고민했다. 그러나 1,2년이 지나기 전까지는 자신의 업무에 대해 명확히 알기 어렵다. 업무가 익숙해져서 다른 이들의 인정을 받는데도 후회가 된다면 그땐 즉시 다른 길을 모색하라. 

 

'만약 내가 전쟁을 위한 무기를 만드는 공장에 다닌다면 나의 일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내가 하늘에 기름을 뿌리고 다니는 비행기를 만드는 공장에 다닌다면 나의 일을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실까?' 진로에 관해 여러 가지 생각들이 들었다. 

 

고민하는 시간은 나에게 참으로 의미 있었다.

내 공부의 목적을 다시 점검하게 되었고, 학문을 통해 공동체와 사람들을 섬기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되었다. 학문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그 배움으로 자신을 살찌우는 것이 아니라 학문을 나눔으로써 이 사회를 윤택하게 만드는 것, 더 나아가 학문에 소외된 사람들에게 그 혜택을 돌리는 것이 학문을 하는 목적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