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코리아 20.11.23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시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한길교회 형제, 자매 여러분~ 모두 평안하신지요?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하기를 날마다 기도합니다.
함께 모여서 예배드리지 못한지가 어느덧 두 주일이나 지났습니다. 우리 모두 만나지 못하고 함께 예배드리지 못해서 그립고 안타깝습니다.
그동안 간단하게 광고 드렸습니다만, 사태가 생각보다 장기화됨에 따라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한 것 같아 아래와 같이 긴 내용과 함께 광고 드리겠습니다. 장문이지만, 꼼꼼히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1. 주일성수와 공예배의 중요성
기독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주일성수와 공예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공동체입니다(예장 고신 헌법 예배지침 제1장 제1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통해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매이는 적극적이고 도덕적이며 항구적인 계명에 따라7일 중 하루를 거룩하게 지키게 하셨습니다. 그날은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로부터는 부활의 날이며 한 주간의 첫째 날인 일요일입니다. 이날을 성경은‘주일’(주의 날)이라고 부릅니다(행20:7;고전16:2;계1:10;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1장 제7절;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116문답).
그렇기에 교회 공동체가 주일에 공동회집으로 모여 예배하는 것은 신자의 기본적인 의무입니다(고신 헌법 예배지침 제2장 제4조). 주일은 거룩하게 지켜야 하며 모든 신자는 사전에 성실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충분히 준비하여 공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해야 합니다(고신 헌법 예배지침 제2장 제5조).
주일에 드리는 공예배는 하나님께서 모든 시대에 걸쳐 신자들에게 명하신 절대적이고, 도덕적이며, 영구적인 계명이며, 세상 끝날까지 계속 지켜야 할 명령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하나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시므로 신자들은 언제 어디서든지 예배할 수 있으나, 한 장소에서 주님이 부활하신 주의 날에 함께 모여 공동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고신 헌법 예배지침 제1장 제2조 1항). 교회 공동체는 반드시 주일에 한자리에 모여 삼위일체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성경, 교리, 교회역사, 고신교회 헌법은 이 사실을 강조합니다(출 20:8; 사 56:2, 6; 행 2:42; 히 10:25;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1장 6-7절;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03문답). 이러한 원리는 결코 경솔하게 소홀히 여기거나 고의적으로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1장 6절).
2. 부득이한 경우
주일성수와 공예배가 마땅한 일이지만, 성경과 교리는 예외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2장 1-13절에서 예수님은 다윗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른 일을 예로 드셨고, 친히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심으로 부득이한 경우 예외가 있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말씀에 근거하여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17문답과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60문답도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나 부득이한 일과 자비를 베푸는 일은 예외라고 밝혀두었습니다.
그렇다면 언제가 부득이한 일입니까? 이에 대해 너무 쉽게 부득이하다고 단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신중하게 생각해야 하고 개인이 임의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교리,교회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개인적인 주일예배 불출석만 아니라 개체교회의 예외 상황을 결정함에 있어서 우리는 항상 신중해야 합니다.개인적인 부득이한 경우에도 절대로 편의나 자의로 결정해서는 안 되고,반드시 교회에 세우신 치리자인 목사와 장로의 권면과 감독에 따라야 합니다.
3. 부득이한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 부득이한 경우가 발생했을 경우, 스스로 판단하거나 결정하기보다는 목사와 장로의 권면에 따라 예배를 대신하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최대한 예배를 드리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가까운 지역교회에서 예배드리도록 하되, 그것이 불가능한 경우 가정예배로 드릴 수도 있고, 교회가 제공하는 예배순서와 설교문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때 반드시 교회의 지도를 따라야 합니다.
교회적으로 부득이한 경우가 발생했을 경우, 가정예배로 드릴 수도 있고, 교회가 제공하는 예배순서와 설교문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혹은 문명의 이기를 잘 활용하여 영상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방식은 모두 부득이한 경우에만 사용해야 할 예외입니다. 영상이나 예배문으로 드리는 예배는 성도 간에 얼굴을 마주하고 교제할 수 없으며, 한자리에 모여 하나님을 함께 예배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본래 공예배의 원리와 목적에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합신총회 신학연구위원회가 2020년 2월 28일 발표한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공예배의 신학적, 목회적 제안”). 그래서 우리교회는 평소에 예배 시간에 녹화를 하지 않고, 유튜브로 설교를 제공하는 일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경우에도 교회의 공예배를 기억하는 가운데 각자의 처소에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4. 전염병과 부득이한 경우
그렇다면 전염병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지금의 현 상황은 과연 불가피하고 부득이한 경우입니까?
성경에는 전염병에 관한 여러 구절이 있는데,가장 대표적인 구절은 시편91편입니다. 3, 6-7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3)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6)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7 )천 명이 네 왼쪽에서,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전염병에서 건져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 보면,이 구절을 단순하게 적용해선 안 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도 분명 전염병에 걸리기 때문입니다. 이번 코로나19의 경우에도 신천지 집단에서 대거 발생했지만, 정통교회의 성도 중에도 걸린 사람이 없는게 아닙니다. 부산,서울,수원,부천 등지의 교회에서도 확진자가 다수 있습니다. 역사를 살펴봐도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전염병에 걸린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편 91편을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해야 합니까?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시편 91편이 마침 신약성경에서 인용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 이하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로부터 세 차례 시험(유혹)을 받으신 사건입니다. 그중에 두 번째 시험을 보면, 마귀가 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그리고 덧붙입니다.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여기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은 “구약성경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느냐”는 마귀의 말입니다. 마귀 주제에 감히 성경을 인용합니다. 공교롭게도 마귀가 인용하고 있는 구절은 시편 91편 중 11-12절입니다. 마귀가 말하는 대로, 아니 시편 기자가 말하는 대로, 설령 우리에게 재앙이 닥쳐도, 위험이 발생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말씀을 듣고 어떻게 하십니까? 뛰어내리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7절)
예수님께서 차라리 뛰어내리셨으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도 증명되고, 시편 91편 11-12절의 약속이 실제라는 사실도 증명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마귀의 성경해석에 오류를 지적하십니다. “말씀을 가지고 함부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함부로 적용해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도리어 그 말씀을 잘못 적용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하심으로 시편 91편에 담긴 의미를 바르게 활용하고 적용하는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시편91편은 위험하게 사용될 소지가 있습니다. 잘못 적용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기독교인들 중에 이런 구절들을 부적처럼 취급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이 구절에 대한 믿음을 넘어 맹신과 미신이 되어 일반적인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 문자주의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신다는 약속을 함부로 남용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환경에서도 신자를 지켜주신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것을 어떤 구체적인 증거로 확인하려는 시도나 그 증거로 믿음이 연약한 신자들을 판단하는 것은 도리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합리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위험에 자기를 노출시키는 것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듯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탄은 지금 우리에게 이렇게 시험할지 모른다. “주 너의 하나님께서 너희를 전염병으로부터 지키실 거야.근데 왜 다함께 모여서 예배 안 드려.믿음이 그것밖에 안 되니.”라고 말입니다.
전염병은 교회역사에서 흔한 일이었습니다.
14, 16세기에도 페스트(Pest)로 알려진 흑사병(黑死病)으로 성도들이 고통을 당했습니다. 1527년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치명적인 흑사병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가?』라는 팸플릿을 출판했습니다(Luther, Martin. “Whether one may flee from a deadly plague,” Luther’s Works, Vol. 43. Fortress Press, 1968). 브레슬라우(Breslau)의 목사인 요하네스 헤스(Johannes Heß)로부터 치명적인 흑사병이 덮칠 때 그리스도인이 도망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질문에 답한 글입니다.
이 글에서 루터는 이렇게 말합니다. “집에 불이 났을 때 하나님의 심판이라며 가만히 있어야 하는가? 물에 빠졌을 때 수영하지 말고 하나님의 심판이라며 익사해야 하는가? 다리가 부러졌을 때 의사의 도움을 받지 말고 ‘이건 하나님의 심판이야. 저절로 나을 때까지 참고 버텨야 해’라고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배고프고 목마를 때 왜 당신은 먹고 마시는가? 이제 우리는 ‘우리를 악에서 구해주소서’라는 주기도문을 암송해서는 안 되는가? 만일 누군가가 불이나, 물이나, 고통 가운데 있다면 나는 기꺼이 뛰어들어 그를 구할 것이다.” 루터는 너무나 경솔하고 분별없이 하나님을 시험하고, 죽음과 흑사병에 대처하는 모든 수단을 무시하는 사람들에 대해 반론을 제기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약의 사용을 멸시하고, 흑사병에 걸린 사람이나 장소를 피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마치 자신들의 강한 믿음을 증명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루터가 볼 때 이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시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을 만드셨고 우리에게 주셔서 그 지식으로써 우리 몸을 지키고 보호하여 건강하게 살도록 하셨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지식과 약을 사용하지 않는 자는 마치 자살하려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루터는 권면합니다. “약을 먹어라. 집과 마당과 거리를 소독하라. 사람과 장소를 피하라.” “나는 하나님께 자비를 베푸셔서 우리를 지켜달라고 간구할 것이다. 나는 소독하여 공기를 정화할 것이고, 약을 지어 먹을 것이다. 나는 내가 꼭 가야 할 장소나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아니라면 피하여 나와 이웃 간의 감염을 예방할 것이다. 혹시라도 나의 무지와 태만으로 이웃이 죽임을 당하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나를 데려가기 원한다면, 나는 당연히 죽겠지만 적어도 내가 내 자신의 죽음이나 이웃의 죽음에 책임을 져야 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웃이 나를 필요로 한다면, 나는 누구든 어떤 곳이든 마다하지 않고 달려갈 것이다.”
SNS나 기고글에 보면16세기 흑사병이 전염될 때도 사람들이 한 장소에 모여 예배했다고 하면서 지금 역시 결코 예외가 되면 안 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하지만,우리는 교회역사를 참고할 때, 의학의 발전이라는 일반 은총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페스트와 코로나19는 전염병이라는 공통점 외에 아무런 공통점이 없습니다. 전염방식이 다릅니다. 뿐만 아니라 의학은20세기에 급격한 발전과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인류가 질병의 원인을 발견한 것은1860년대입니다.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발견한 게1928년입니다. 인류가 바이러스의 존재를 알게 된 것도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눈으로 확인하게 된 것은1950년대 전자현미경이 등장한 이후의 일입니다. 의학의 발달은 우리의 인식도 변화를 주었습니다. 그렇기에2020년에 16세기의 의학에 근거한 행동을 따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인류에게 허락하신 일반은총을 무시하는 일입니다. 16세기의 흑사병 때 신앙인들이 어떻게 했느냐를 단순하게 적용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14, 16세기 신자들이 흑사병이 돌 때 교회당에 모여든 것은 비판 대상이 아닙니다. 그들의 지식 범위 안에서 이뤄진 당연한 일입니다. 아직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때이기에, 도무지 알 수 없던 시절에 그들 나름의 합리적인 태도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믿음에 근거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우리는 전염병의 원인과 전염방식을 알고 있으며, 그것을 빨리 퇴치시킬 방법도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5. 코로나 19와 부득이한 경우
전염병이라고 해서 반드시 공예배를 예외로 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전염병마다 다양한 특징이 있기 때문입니다. 페스트와 코로나19를 동일하게 취급할 수 없듯이, 전염병마다 동일하게 취급할 수 없습니다. 예컨대, 장티푸스, 콜레라, 결핵, 천연두, 뇌염, 독감도 전염병이지만, 그 질병의 유행기간이라고 해서 공예배를 예외로 하지 않습니다. 사스(2002년), 신종플루(2009년), 메르스(2015년)때도 공예배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코로나19는 비말(飛沫)을 통해 감염되며, 전염력이 상당하다는 점, 특히 실내에 집단으로 모인 곳에서의 전염력이 매우 크다는 점을 고려했습니다.
지금은 집단감염과 지역사회감염이 전국적으로 확산 되고 있습니다. 2월23일 대한민국 정부는 감염병에 대한 국가 위기경보를 심각 단계로 격상했습니다. 3월11일(현지시간)세계보건기구(WHO)는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대해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을 선포했습니다.
이러한 경우이기에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며, 인내, 화평, 온유, 자비, 친절을 그들에게 보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이웃을 해악으로부터 보호하며,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모든 주의 깊은 연구와 합법적인 노력을 다하며, 누구의 생명이든지 부당하게 빼앗아가려는 모든 생각과 의도를 저항하며, 합법적이고 필수적인 생명 보존의 방편을 소홀히 하거나 철회하지 말라는 제6계명의 정신(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07문답;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36-137문답)과 공공의 선을 장려하려는 정부의 노력을 존중하고 협력함으로써 우리의 자유와 권리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여(참조, 고전 9:18-23; 10:23-29; 벧전 2:13-16)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는 주님의 교훈을 드러내기 위해서(막 2:27) 부득이한 경우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우리 교회는 대형교회가 아니며, 회중이 서로를 잘 알기에 외부인으로 인해 일어날 문제도 없고, 서로 조심하고 배려하면서 예배해도 큰 무리가 없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전 국민적으로 코로나 19의 퇴치를 위해 노력하는 시점에 교회도 그 일에 동참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언론기사나 포털 사이트의 댓글을 보면 기독인에 대한 비기독인들의 분노가 극에 달한 상황입니다. 비기독인들이 교회에 대해 불편한 시각을 갖고 있는 시점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 역시 보편교회 중 하나로서 교회에 대한 비판과 혐오를 염두에 둔 결정입니다.
손재익 목사(한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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