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영관리/CEO

세계가 감탄한 서산 간척지 '정주영 공법'

[정주영 이야기⑪]






【서울=뉴시스】정리/우은식 기자 = 1988년 서울올림픽을 얼마 앞둔 어느 여름 날이었다.

정주영 회장은 서산 간척지를 찾아온 손님들에게 길을 안내하며 크게 웃었다. 눈앞에는 서울 여의도의 33배에 달하는 1억5537만㎡(4700만평) 땅에 푸르른 벼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1979년 시작한 서산 간척지 사업은 굴곡 많은 서해안의 바다를 메워 옥토를 만들겠다는 국토개발 프로젝트였다. 당연히 정부가 맡아 진행해야 맞았지만 정부는 민간 기업이 해결해주길 바랐다.

그러나 기업의 입장에서는 전혀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사업이라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이때 나선 사
람이 정주영 회장이었다.

“대통령 각하, 해외에 나가 있는 저희 건설장비들을 들여다가 국토 확장 사업에 쓰겠습니다. 해외 근로자들의 일자리도 그대로 지켜줄 수 있고, 여러 모로 좋을 것 같습니다. 마침 해외 건설 수주도 줄었으니 문제없습니다.”

“정말이오? 정 회장이 그렇게 해주겠다면 나도 안심이오.”

회의실 문을 닫으며 정주영은 아버지를 떠올렸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산을 개간해 밭으로 만들다보면 그의 아버지는 허리 한 번 바로 펴지 못 한 채 손이 갈퀴가 되어 자갈을 추리고 괭이질을 했다. 한 뼘의 밭 뙈기라도 더 넓히려고 땀을 흘렸다.

‘토끼 새끼만한 국토가 그나마 허리가 잘려 반쪽인데, 사람은 오글오글 많으니 그렇게들 살았지. 외국처럼 넓은 들판에서 트랙터로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면 그런 가난은 없었을 것이다.’

정주영 회장은 어린 시절의 추억과 외국 여행의 기억을 통해 이렇게 새롭고 의미 있는 일을 벌이기로 했다.

‘아버지는 우리 가족들을 굶주리지 않게 할 만큼의 논밭을 갖는 것이 평생 소원이었다. 내가 개간해서 아버지가 하늘에서나마 풍족한 마음으로 이 땅을 내려다보게 해드리고 말겠다.’

정주영 회장은 기자들에게도 선언했다.

“농업 전문가들의 말에 따르면 미국 농업보다 우리 농업이 60년이나 뒤떨어 졌다고 합니다. 내가 그것을 한번 따라잡아보려고 합니다. 택시 운전을 하는 것보다 농촌에서 트랙터를 운전하는 것이 더 나은 시대를 만들겠습니다.”

일에 착수하자마자 정주영답게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그는 서산 간척지 착공부터 완공이 될 때까지 새벽 6시면 청운동 자택에서 서산 사무실로 전화를 했다.

“불도저, 포클레인은 제 위치에 제대로 놓았어? 내가 확인하러 내려갈 거야.”

벽에 걸어둔 지도 위에 포클레인 위치도 표시하며 확인을 했다. 끊임없는 잔소리를 하고, 일주일에 두 번 이상은 현장에 내려가 공사 감독을 하기도 하고, 인부들과 같이 일을 하기도 했다.

“한 뼘이라도 더 만들어야 우리 후손들이 큰 옥토를 가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먹고 사는 것은 세계 경제가 어찌 돌아가든 전쟁이 터지든 평화가 지속되든 우리 스스로 해결해야 합니다.”

현장 근로자들과 함께 밥을 먹을 때에도 왜 이 공사가 중요한지 틈만 나면 강조했다.

서산 현장에는 취재 기자도 많이 찾아왔다. 기자가 물었다.

“회장님, 간척 공사가 조선소 공사랑 맞먹는 대규모 공사인데 조선소 지을 때랑 지금이랑 언제가 더 좋습니까?”

“당연히 지금이 좋지. 울산 조선소 만들 때는 솔직히 내가 뭘 아는 게 있어야지. 긴장하고 또 긴장했어. 그런데 지금은 다 해본 일 아닌가? 니나노∼ 노래하면서 하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변수가 많은 건설 현장에서 어찌 노래만 나올 수 있었겠는가? 서산 공사도 어마어마한 간척 사업인지라 커다란 난관을 만났다.

◇정주영 공법

간척지 사업은 방조제를 쌓아 바닷물을 가두고 그 물을 빼서 육지로 만든다. 먼저 해야 할 일은 방조제를 만들어 물을 막는 것, 이를 ‘물막이 공사’라고 한다. 그런데 착공 5년째 되던 1984년에 한 최종 물막이 공사는 가장 어려운 공사였다.

방조제의 길이는 6400여 미터였는데, 그중 마지막 남은 270미터를 쌓을 수가 없었다.

초속 8미터의 무서운 급류가 흘렀기 때문이다. 한강이 여름 홍수 때 초속 6미터로 흐르니 그 세기가 얼마나 빠른지를 비교해볼 수 있을 것이다.

자동차만한 바위를 넣어도, 30톤 덤프트럭들이 끊임없이 돌을 날라도, 거센 물살은 이 모든 걸 한 번에 휩쓸어가 버렸다.

“최신 장비들을 다 써도 소용이 없습니다.”

“학계에도 문의해보고 해외 건설사에 컨설팅 의뢰도 해봤는데 모두 속수무책입니다.”

정주영 회장은 그동안 수많은 공사를 하면서 얻은 모든 지혜를 짜냈다.

“그럼, 이건 어떨까?” 정주영의 머릿속에 번쩍하고 떠오른 아이디어는 ‘천수만호’였다.

천수만호는 원래 유조선으로 사용하던 23만 톤 급 스웨덴 배였다.

현대가 해체해서 고철로 팔기 위해 30억 원을 주고 사들여 울산에 정박시켜두고 있었다.

“폭 45미터, 높이 27미터, 길이는 322미터. 충분해. 천수만호로 막아두고 메우면 어떨까?”

“회장님, 그게 가능한지는 아직 검증된 바가 없습니다.”

“이론도 중요하지만 학교에서 배운 이론만 따라하면 세상 공사를 다 할 수 있겠나? 즉시 현대정공, 현대상선, 현대중공업 기술진에 모두 연락해. 유조선을 가라앉힐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라고.”

건축학 어디에도 없는 ‘유조선 공법’이 성공할지 실패할지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천수만호가 서산에 도착했다.

수많은 취재진 앞에서 유조선 가라앉히기가 시작됐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그렇게 애를 먹이던 물막이 공사가 이틀 만에 끝이 났다. 어려운 공사를 해결해서 얻은 열매는 달고도 달았다.

이 유조선 공법으로 공사비를 290억원 절감했다.

탄탄한 이론들에 비해 다소 허술하고 황당해 보이던 유조선 공법은 ‘정주영 공법’이라고도 불리며 뉴스위크와 타임지에 소개됐다.

영국 런던의 템즈강 하류 방조제 공사를 맡은 철구조물 회사에서 유조선 공법에 대해 문의를 해온 적도 있다.

‘스스로 아이디어를 내고 검증해볼 생각은 않고, 책 속에서만 답을 찾고 권위에만 의존한다면 창의력은 죽고만다. 창의력이 없으면 획기적인 변화도 없어.’

오랜 시간 힘든 과정을 거쳐 서산 간척지는 1988년에 드디어 대규모 기계화 영농단지로 탈바꿈했다.

비행기로 볍씨를 직파(논밭에 직접 씨를 뿌리는 일)하고, 재배, 수확까지 완전 기계화하자 정주영 회장이 꿈에 그렸던 농장과 가까운 모습이 되었다.

◇장대한 꿈의 출발점, 시베리아

서산 간척지 사업은 정주영 회장이 아버지를 그리는 마음에서 시작해 지도까지 바꾼 대공사였다. 간척 공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를 지어갈 무렵, 정 회장은 고향 생각이 더욱 났다.

‘고향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

정주영 회장은 정치적으로 통일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여러 소식통이 전하는 북한 경제의 심각성, 주민들의 기아 문제에 가슴이 아팠다.

그런 정 회장에게 북한 주민들을 도울 기회가 찾아왔다. 

1989년 1월 한·소 경제협회 회원들과 함께 소련을 방문한 것이다. 1988년에 성공적으로 치른 서울올림픽 덕분에 소련 및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은 한국을 믿음직한 경제 파트너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기업 간 경제 교류도 점점 확대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세계적으로 공산주의 진영에 자유화 바람이 불어왔다. 사회주의 국가의 선봉장이었던 소련도 그 여파로 심한 몸살을 앓았다.

가장 먼저 경제 분야에서 적색 경보가 울렸다. 급한 불을 끄기 위해 한국 기업인들이 소련으로 급파되었다.

가장 급한 문제는 소련이 수입한 물건의 대금을 지불하지 못하는 사태가 잇따라 발생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일시적인가 아닌가는 경제인들 사이에서도 중요한 문제였다.

정주영 회장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문제의 실마리를 찾고자 했다.

소련은 현대 측에 외상으로 선박 20척을 주문하려고 했다. 20척의 선박값은 11억 5000만 달러. 엄청난 규모의 금액을 모두 외상으로 거래를 하자니 소련도 현대도 난감했다.

이때 정 회장이 현금 거래가 가능한 해법을 내놓았다. 소련이 엄청난 양의 화물을 가지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이다.

“화물만 충분하다면 소련은 얼마든지 현금으로 선박을 건조할 수 있습니다.”

정주영 회장은 유럽 은행 등에서 화물을 담보로 소련이 현금을 확보할 수 있도록 도왔고, 그 돈으로 선박 20척의 현금 계약을 성공시켰다.

정 회장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정부 관계자에게 이야기했다.

“시베리아에서 개발하는 자원이 가격 경쟁력만 갖추면 자본은 세계 시장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오랫동안 공산 체제에서 살았던 소련 사람들은 단지 세계의 자본을 동원할 방법을 모를 뿐입니다. 우리가 그 방법을 찾아주겠다는 겁니다.”

아직 미수교 상태였지만 정부는 정주영이 한·소 경제협회 대표 자격으로 시베리아 개발 문제 등을 협의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다.

<계속>

eswoo@newsis.com

<저작권자ⓒ '한국언론 뉴스허브' 뉴시스통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