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의 의미[意味]
요즘 복음송 홍수 시대에 살고 있다. 이 복음송 홍수시대를 맞이하여 진정한 찬양이 손실되어 알맹이 없는 노래들만 부르고 즐기지 않는가 걱정이 된다. 복음송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것은 미국의 복음전도자 무디와 쌩키였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전도의 목적으로 복음송을 집회 때마다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60년대에 들어오면서 미국의 히피들을 전도하기 위한 모습으로 척 스미스 목사님의 갈보리 교회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현대 기독교 음악이라 불리 우는 복음송이 확산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복음송의 운동의 뒷 편에는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뜨거운 열정이 숨어있음을 부정 할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양성화되면서 이다. 특별히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는 기독교음악의 일반 음악계로의 진출로 인하여 논란이 된 것이다. 영적인 뒷받침이 되지 않는 가수와 노래들이 무분별하게 나타남으로 오히려 좋은 복음송을 훼손시키고 격하시킨 것도 사실이다. 기준이 없이 자신들의 삶을 간증이라도 하듯이 부르는 복음송이 버젓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로 둔갑하는 일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변화되는 신세대의 출현은 이제 전통적인 찬송가를 포기하는 경향까지 이른 것이다. 이것이 기성세대와의 오해를 가져오는 계기가 된다.
실제로 신세대들은 찬송가를 제대로 알고 잊지 못하다. 알지 못할 뿐 아니라 부르지도 않는다. 이것은 복음송에 대한 의심을 하게 하는 부분이다. 그 복음송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준비되어졌다면 문제는 덜 한 것이다. 그러나 찬송가를 잃어버리게 한다면 문제가 될 수있을 것이다. 물론 찬송가도 모든 곡이 정당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불균형적인 찬양의 모습을 가저 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송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사실상 복음송의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대안이 그리 없다. 어떨 때는 억지 춘향이식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많다. 왜냐하면 음악역시 하나님의 일반 은총에 포함된 것이다. 만약에 이것을 부인한다면 신학적인 혼란이 초래 할 것이다. 또다시 율법주의로 흐를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래서 나온 대안이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당시의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오로지 시편으로 찬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시편의 찬송은 종교개혁자 칼빈의 정신으로 이어졌고 실제로 칼빈은 시편으로 찬양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이와는 반대로 자기 생애동안 수많은 찬송을 작곡하였다. 당시로 본다면 복음송이었다. 이들의 목소리는 매우 일리가 있다. 성경의 찬송은 분명히 시편이었다. 시와 노래와 찬미의 제사는 시편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음악이라는 일반은총의 선물이다. 이 일반은총의 선물인 음악을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이다. 즉 시편을 부르되 현대음악을 가지고 부르는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이다. 이것도 문제라면 우리는 곡 없는 시편을 찬양해야하는가? 물론 여기에 영적 분별력이 있어야 함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찬양에 대한 너무나 다양한 신학적 해석이 있고 논란이 있다. 그래서 저마다 신학적 배경을 가지고 주장한다. 여기에 골병드는 것은 바로 신학적 지식이 뚜렷하지 않는 평신도들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인가 ? 그렇다고 소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논란이 되는 가운데에도 통일점은 있다 그것은 바로 공 예배시간에는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묵시적인 것이요, 목회자의 신학적 배경에 따라 다르다. 이렇게 다양하고 복잡한 찬양에 대한 의미를 바로 아는 것은 매우 필요하다. 이 작은 글에서 모든 것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기회가 주어지면 좀더 자세하게 찬양의 문제를 생각해 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일반적인 찬양의 의미만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찬양이란 뜻을 알아보자
찬양이란 말의 뜻은 헬라어로ΕʾυλοΎεω(에울게오) 칭찬한다, 축복한다, 즉 하나님(θεός)의 은혜로운 힘을 불러 내리는 것으로 되어있다. 하나님(θεός)께서 은혜(恩惠)를 주심을 감사하며 부르는 노래이다. 그리고 노래 뿐만아니라 행함도 찬양의 넓은 의미(意味)에 포함된다. 자기영역 속에서 열심히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삶의 자체가 찬양이 된다는 것이다. 원어에서 보았듯이 “하나님(θεός)의 은혜로운 힘을 불러 내리는 것”우리의 삶은 예수그리스도 구속의 은혜 때문에 그 기쁨으로 하나님의 나라(θεός βασιλεία)를 위해 삶을 개척해나간다. 하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구약의 찬양과 신약의 찬양과는 사뭇 다른 점이 있다.
구약백성은 아무나 찬양할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유대민족중의 레위지파 사람들만 찬양대를 조직하여 여호와를 찬양하였다. 구약시대의 찬양은 일방적이며 여호와의 명령에 의해 부르게 되었다. 성경에 종종 기쁨으로 찬양하는 장면들이 나오는데 이것은 극히 일부분이며 시편에서 찬양이란 단어가 나온 것은 예수그리스도가 오실 신약 백성의 기쁨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레위지파 에서 하나님(θεός)께 영광(榮光)을 드리는 것은 은혜에 감사해서가 아니라 의무적인 것이다.
그렇다고 구약백성은 은혜(恩惠)를 누리지 못했다는 것은 아니다. 구약백성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찬양할 뿐 아니라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기쁨을 찬양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찬양하였다.
그러나 신약백성은 의무적인 것이 아니라 기쁨과 감사와 자발적인 마음으로 찬양을 하였다. 예수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율법(律法)에서 해방(解放)되어 자유(自由)와 복음(福音)에서 우리는 영원히 복된 풍성한 삶을 살게 되었는데 이런 삶이 바로 자발적인 찬양을 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의 평강을 누리지 못한 사람은 찬양할 자격이 없으며 진정으로 찬양할 수가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신약 백성은 구약 백성과 달리 삶속에서 죄와 투쟁하는 삶이 곧 찬양이 된다. 더 나아가서 복음의 풍성한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을 기뻐하시게 하며 우리 또한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그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결국 찬양의 의미는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구원이 우리에게 이루어짐을 감격하며, 감사하며, 기뻐히며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찬양의 곡조역시 경박한 멜로디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곡조의 탄생이 이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쉽게 이해한다면 흑인 영가는 노예로 팔려온 아픔과 서러움을 표현하기 위하여 태어났고, 록음악은 기성세대에 반항하며 하나님 없는 세상을 추구하는 심정으로 태어났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트로트 역시 민족의 한을 담는 수단으로 태어났다. 이렇게 본다면 곡조 하나 하나에도 신중한 분별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복음송은 전도하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로서 믿지 않는 사람들의 귀에 익힐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그러나 오늘의 복음송의 모습은 전도용이 아니라 교회안의 노래가 되어버렸다. 혹자는 지금의 복음송은 우리의 기분을 맞추는 노래가 되어버렸다고 한다. 즉 그 곡조에 흥겨워 즐기는 노래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또한 유행가나 다름없는 곡조는 우리의 감정을 고조시키며 이 감정에 흥분되어 은혜 받은 양 표현하며 행동을 취하는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 보다는 “기독교적 스트레스 해소법”의 주메뉴로 나오고있다고 비아냥거리기 까지 한다.
사실상 오늘날 빈야드 운동을 통하여 거룩한 웃음이니, 제3의 물결이라는 용어로 찬양의 깊은 의미보다는 영적 감동을 받는 도구로 전략해버린 찬양의 모습을 우리 주변에서 자주 보게 된다. 매우 안타까운 모습이다. 특별히 찬양집회를 통하여 오해받을 소지를 가지고 있는 것도 보게됨을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복음송 불가는 또한 이치에 맞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하나님은 여전히 일반은총을 통하여 문화의 발전을 가져왔다. 이 문화의 발전을 우리는 무시해서는 안된다 다만 우리는 이 문화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 변혁시키고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찬양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도 매우 균형 잡힌 시각이 필요하다. 우리는 찬양의 달란트를 가지고 열심히 복음을 증거 하는 사람들을 무더기로 매도할 자격이 없다. 그렇게 된다면 원흉인 무디와 쌩키 그리고 갈보리 교회의 척스미스목사 이와 함께 마틴 루터도 매장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결코 아름다운 일이 아니요 우리의 권한도 아니다. 문제는 우리의 찬양의 모습의 균형이다. 이 균형이 바로 잡히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는 그리 아름답지 못한 결과들을 양성하여 낼 것이다. 그럼 우리의 현실을 보자.
우리는 얼마나 찬송가를 부르는가?
우리의 예배를 보면 찬송가를 거의 부르지 않고 있다. 복음송에만 너무 치우치는 이 상황은 균형 잡힌 모습을 유지하기 어렵다. 좀더 균형 잡힌 시각이 필요하다. 이러다가 찬송가는 필요 없는 책이 되어버릴지 모르겠다. 찬송가의 깊은 의미를 묵상하며 찬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찬송을 부르면서 우리는 두 번 기도한다고 하였다. 한번은 곡조로 기도하는 것이요, 또 한번은 가사로 기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찬양의 모습이 균형 잡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복음송의 전부를 잘못되었다고 하지 않으며 부르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복음송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정말 잘 나타내는 가사 곡조는 얼마든지 있다. 중요한 것은 복음송을 신중히 골라 부르며 올바른 판단으로 불러야 하며 부르는 우리들의 균형 잡힌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 복음송을 애창하는 이에게 부탁하는 것은 찬송가도 많이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찬송가야말로 복음 송 중에 복음송이다.
결론(結論)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것은 감정이나 분위기만으로 누릴 수 없다는 사실을 명백히 해두고 싶다. 신약백성들의 진정한 찬양은 자기 영역 속에서 열심히 죄와 투쟁하며 하나님의 나라(θεός βασιλεία)건설에 부단히 노력하며 자기의 모든 것 받치는 삶이 진정한 찬양이요, 이것을 하나님(θεός)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을 기억하기를 바란다.
하나님(θεός)의 은혜가 너무 크며 예수의 사랑을 감당하기가 어려워 삶으로서 노래로서 하나님(θεός)의 영광을 표현하며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드릴 때 더욱 크신 은혜를 베푸심을 체험할 것이다. 하나님(θεός)께 영광 돌리는 것은 육적 감정이 될 수 없으며 영혼 깊숙한 곳에서 우리나오는 감정이 되어야한다. 이것은 성령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한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참다운 감정과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나라(θεός βασιλεία) 건설에의 노력이 필요하며 이런 생활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義)를 드러내어야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되어질 것이다.
이런 의미 속에 오늘 날 유행[?]하고 있는 열린 예배의 문제점도 한번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 균형잡힌 찬양생활을 제언하고자 한다.
신동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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