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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교수가 꼽은 한국 정치사의 12가지 쟁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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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은 자기 얼굴부터 밝혀. 여야 모두 절규로 받아들여야”
사진=조현호
한국외대 이정희(李政熙·65)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두 달 전 명예교수가 됐다. 명예교수로 현역에서 한 발짝 물러나면서 아주 두꺼운 역사책을 펴냈다. 

《한국현대정치사의 쟁점》(인간사랑 刊)은 전체 689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30여 년간 ‘한국 정치사’ ‘한국 정치사회의 전개’ 등의 학부 강의와 ‘한국 정치사’ 관련 대학원 강의의 결과물이라고 할까.
  
  사실, 이 교수가 평생을 가르친 한국의 정치 현실은, 그의 표현대로, ‘소용돌이 속의 정치’ 또는 ‘파행과 역동의 정치’였다. 그런 진창과 같은 한국 정치를 이해하는 지름길은 무엇일까.
  
  이 교수의 답은 “하나의 정답을 찾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열린 자세로, 열린 역사인식으로 역사를 조망하면 찾을 수 있는데 긍정의 역사는 물론 부정의 역사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사실 “한쪽에 서기를 강요하는 사회의 분위기가 자칫 현대 정치사에 대한 개방적 논의를 어렵게 하고 있어” 안타까운 일이다. 그의 말이다.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의 역사든 영광의 역사와 지우고 싶은 굴욕의 순간이 공존하고 있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우리의 현대 정치사 역시 영광과 굴욕을 포함하고 있죠. 긍정적 유산을 계승하고 부정적 측면을 극복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우리의 발자취에서 보기 좋은 것만 취사선택하거나 우리의 부정적 모습만을 강조해선 안 됩니다.”
 
 이 교수는 한국 정치사의 자랑스런 발자취와 부끄러운 흔적을 모두 보여주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그래서 책을 읽고 시민사회, 학생, 시민들이 어느 일방의 목소리에 휘둘리지 않기를 바란다.
  
  그는 《월간조선》 독자를 위해 한국 현대 정치사의 가장 중요한 쟁점 12가지를 꼽아주었다. 각 쟁점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지난 10월 5일 서울 여의도에서 이 교수를 만났다. 현재 그는 사회정의시민행동 공동대표, 세계시민포럼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숲 해설가’로 새로운 도전을 준비 중이다.
  
  
  1. 일제하 좌우합작 시도

해방정국의 정치적 분열을 막기 위해 좌우합작 운동을 전개했던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 선생.

  한국의 좌파와 우파는 단순한 이념적 갈등보다 분단과 전쟁의 역사 경험에 따른 이념 갈등이 근저를 이루고 있다. 해방 이후 정치적 파벌 간의 경쟁은 적대적이며 공존을 허용하지 않은 증오의 정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일제 식민지 시기에는 오늘날과 같이 좌파와 우파가 서로 적대적이지만은 않았고 민족해방이라는 공통된 목표를 위해 협조하고 연합한 사례가 존재하고 있다.
  
  1920년대 민족유일당운동, 6·10만세운동 전개 과정, 신간회 창립 과정에서 좌우합작 운동의 예를 찾을 수 있고 1930년대 역시 좌우합작 운동의 결과물인 전국연합진선협회가 있었다.
  
  또 1940년대 중경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좌우합작 운동을 빼놓을 수 없다. 임시정부가 창설한 한국광복군에 좌익세력인 조선민족전선연맹의 조선의용군이 편입된 사례도 있다.
  
  이정희 교수는 “한국 정치사에 양극단의 목소리만 존재하지 않았다. 좌우합작 시도가 결국 실패로 끝이 났지만 면면히 이어왔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현재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는 ‘민주정부 20년 집권’을 얘기하고 자유한국당 김병준 비대위원장은 ‘보수의 재건’을 말합니다.
  
  이제 정치권도 양극단의 정치로는 국민 지지를 받기 어렵다는 것을 조금씩은 느낄 거예요. 김병준 위원장이 보수의 길을 찾는다는데, 그것보다 보수·진보를 모두 뛰어넘는 가치를 고민해야 합니다. 민주당이나 바른미래당도 마찬가지고요. 앞으로 국민은 양극의 목소리가 아닌 건강한 중간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지 않을까요?”
  
  
  2. 친일세력의 청산
  
  일제 식민지로 전락했던 조선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해방을 맞았다. 36년간의 식민통치 결과로 인한 일제 잔재 청산과 미·소의 분할점령에 따른 통일된 주권국가 수립이 민족적 과업이었다.
  
  그러나 친일파 청산은 해방 직후 미군정(美軍政)의 조선총독체제 및 일제 관료·경찰 등의 이용정책과 보수 우익의 반공정권 수립정책으로 인해 좌절되고 말았다.
  
  그 결과, 일제의 지배를 돕고 동족을 배반했던 부일(附日) 협력자를 제대로 청산·처단할 수 없었다. 친일 청산은 여전히 한국 근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이자 현대 보혁(保革) 갈등의 뿌리로 보는 시각이 있을 만큼 한국 정치사의 핵심적 위치에 있다.
  
  이 교수는 “우리의 식민체제는 프랑스와 다르다. 그 기간이 36년에 이른다. 게다가 일제라는 정체가 워낙 가혹한 식민체제였다. 한반도를 떠나지 않고 이 땅에 살았던 사람은 친일, 부일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그것이 (친일 청산을 어렵게 만든) 우리의 불행이었다”고 말했다. “비난하고 들춰내는 차원이 아니라 용서와 화해로 역사적 파행과 질곡의 역사를 치유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 교수의 생각이다. 그의 말이다.
  
  “친일 청산의 정도를 들어 남북한 정부의 정체성 내지 정통성을 거론하는데, 당시 부의 분포나 계급적 구도로 볼 때 북한에서는 천 마지기 지주도 별로 없었거든요. 반면 남한에선 상대적으로 지주가 많았어요. 이런 차이를 덮어두고 정체성·정통성을 얘기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봅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취약한 국내 기반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고 한민당을 포함한 친일파 세력을 활용하는 방법을 택했다고 볼 수 있어요. 또 친탁과 반탁, 반공, 반소를 거치며 친일세력이 이승만 세력에게 붙으니까, 이들이 마치 우익처럼 돼 버린 측면도 있었죠. 이와 함께 미군정의 반공, 반소 또는 반북, 반혁명의 이데올로기적 지향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3. 건국일 논쟁
  
  대한민국 건국일을 둘러싼 논쟁의 시작은 2006년 7월 서울대 교수(이영훈)의 칼럼 ‘우리도 건국절을 만들자’에서 촉발되었다.
  
  1919년 건국의 주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가라는 인식으로부터 시작한다. 즉 임시정부는 임시헌법을 통해 국민·주권·영토 등 국가의 3요소를 규정했을 뿐 아니라, 3·1독립선언을 통해 독립국임을 선언하고 독립국으로서 세운 결과물이 바로 임시정부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1948년 건국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임시정부가 국가 구성의 3요소를 갖추지 못했다며 맞선다. 임시정부가 상주하는 인구, 명확한 영토, 정부, 주권 등 국가 구성에 필요한 실체적 요소를 완비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의 승인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국가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양측 주장에 모두 일장일단(一長一短)이 있다. 서로 따져봐야 입씨름에 불과하다. 건국일 논쟁은 실익이 없으니 자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임정의 중요성을 얘기하는 것까지는 좋지만 그렇다고 현대 정치사를 재단하려는 것은 우려스럽습니다. 논쟁을 정부가 이끌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대통령) 주변 사람들이 말려야 하는데… 대통령 차원에서 톤다운시켰으면 좋겠어요.”
  
  
  4. 제2공화국 재조명

1960년 6월 15일 내각책임제를 골자로 한 헌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시민들이 제2공화국 탄생을 기뻐하며 국회 밖에서 환호하고 있다.

  제2공화국은 1960년 4·19혁명으로 인해 탄생했다. 3·15부정선거로 촉발된 4·19혁명은 이승만의 하야를 이끌어 냈고, 국회는 시국수습 방안으로 개헌과 총선거 실시를 결의했으며 허정(許政·1896~1988)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부가 구성됐다.
  
  당시 국회가 결의한 시국수습 방안에 따라 국회는 헌법 개정기초위원회를 구성했고, 한 달 남짓한 활동 끝에 6월 초 의원내각제를 골격으로 하는 헌법 개정안을 마련, 국회에 제출했다. 그해 6월 15일 국회 본회의에서 헌법 개정안은 압도적인 찬성을 얻어 통과됐고 같은 날 공포됐다. 최초의 여야 합의에 의한 개헌이었다.
  
  이 교수는 “4월 혁명의 붉은 피 위에 출범한 제2공화국은 민주당 분열로 인한 혼란 속에서 출범했다. 그해 8월 19일 장면(張勉·1899~1966) 총리 지명의 인준 이후 이듬해 5월 16일 박정희(朴正熙)의 군부 쿠데타까지, 채 10개월도 집권하지 못하고 단명으로 끝나버린 제2공화국은 역사의 상반된 평가 속에서 진정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당시 정치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웠지만 군사 쿠데타 세력이 자신들을 정당화시키려고 제2공화국의 면면을 왜곡시키고 당대 현실보다 더욱 평가절하시킨 측면이 강합니다.
  
  제2공화국은 짧은 기간 동안 국토개발계획을 만들었고 이 기간 중 준비·입안되거나 실시됐던 경제정책은 군부 쿠데타 이후 등장한 각종 정책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고 압축적인 경제개발 사업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준비에 일조한 것이죠. 따라서 제2공화국을 역사적 맥락에서 재조명할 필요가 있으나 연구가 제대로 안 됐습니다.”
  
  
  5. 5·16군부 쿠데타
  
  장면의 민주당 정부를 무력으로 전복하고 권력을 장악한 1961년 5월 16일 박정희의 쿠데타는 자칭 군사혁명이었다. 국가권력을 한 손에 장악한 박정희는 바로 국가재건최고회의를 구성, 각종 정책을 추진하면서 한국 사회의 변화를 시도했다.
  
  5·16쿠데타와 제3공화국의 정부 수립은 한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가른 중대한 사건이었다. 정치적 측면에서 5·16은 민간 우위의 정치 전통과 제2공화국의 민주주의 실험을 파괴·부정했다. 또 이후 18년간 유지된 강권적 통치체제를 등장시켰으나 경제적 측면에서 산업화가 본격화되어 고도성장의 발판이 마련된 시기였다.
  
  정치적 민주주의의 후퇴와 경제적 성장이라는 명암(明暗)은 오늘날까지도 5·16쿠데타의 역사적 성격에 대한 상반된 평가가 내려지고 있는 근본 원인이 되고 있다. 이 교수의 말이다.
  
  “5·16쿠데타가 불가피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당시 군부 내부에 불만세력이 커졌고 중남미나 미얀마(버마) 등 제3세계에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는 상황이었죠. 군은 강한 조직이고 강한 행위자였기에 거기서부터 (쿠데타가) 나왔다고 봅니다. 4·19혁명이 터졌을 때 육사 8기들이 ‘우리가 선수를 놓쳤다’고 얘기한 것은 그 이전부터 계획이 있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그러나 당시 국민정서로 봤을 때 군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죠. 왜냐면 경제발전을 시켜주고 혼란한 질서를 잡아주었으니까 말이죠.”
  
  
  6. 維新체제

1972년 10월 17일 정부 대변인 김성진씨가 10월 유신 실시와 함께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됐음을 알리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박정희 정부는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후 3공화국을 출범시키고 개헌을 통해 정권을 연장한 후, 국가안보와 경제성장을 위한 체제 전환이라는 이유로 1969년 9월 3선 개헌안을 변칙적으로 통과시켰다.
  
  이 체제하에서 폭압적 정치가 지속되면서 인권과 민주의 가치가 추락하고 시민의 자유는 억압받았다. 이 시대는 억압의 시기이기도 했지만 역설적으로 성장의 시기이기도 했다.
  
  유신체제 당시 경제성장에 주목, 중산층이 성장하고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 세력이 성장하며 역량을 축적했다.
  
  그러나 결국 집권층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났고 종국에는 중앙정보부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하여 유신체제가 붕괴됐지만 민주화로 바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이 교수의 말이다.
  
  “어떻게 보면 당시(유신시절) 경제적 심화의 과정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중화학공업으로 자본 축적이 더 필요한 시기였어요. 그러려면 노동배제적인 정책, 일종의 민중배제라고 할 수 있는 정책을 펴야 했어요. 노사타협을 끌어내기보다 계속 억압적이고 국가조합적인 체제를 유지 강화시켜야 자본 축적이 제대로 이뤄질 수 있다고 봤던 것이죠.
  
  그러나 중화학공업화의 길로 가기 위해 유신을 택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정치적·경제사회적 위기, 남북관계의 위기 등을 한번에 뒤집을 수 있는 카드는 정권을 강하게 휘어잡는 것이었죠.”
  
  
  7. 부마항쟁과 광주민주화운동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에서 박정희 유신체제에 반대해 일어난 ‘부마항쟁’은 잊힌 항쟁으로 불린다. 다른 민주화운동과 달리 재조명되거나 민주화 이후에도 진상규명을 위한 시도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부마항쟁이 발생한 지 35년이 흐른 지난 2014년 진상규명과 보상을 위한 위원회가 출범했고 그 이듬해에 비로소 특별법이 만들어졌다. 부마항쟁과 발생 시기가 1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광주민주화운동과 달리 제대로 기억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유신체제 종식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어떻게 민주화 의지가 좌절되었는지, 왜 부산과 마산 지역에서 발생하였는지, 이제라도 기억하고 논의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 이 교수의 주장이다.
  
  광주항쟁과 비교해 부마항쟁이 잊힌 항쟁이 된 이유로 ①두 사건의 역사적 순서와 규모에서 오는 차이를 들 수 있다. 부마항쟁은 유신 종식과 서울의 봄, 광주항쟁에 영향을 미쳤으나 신군부 등장으로 가려졌다. ②광주와 달리 부산·마산의 항쟁은 기간이 짧고 첫 발화지였던 운동권의 조직 역량이 충분하지 못했고 항쟁의 주체가 뚜렷하게 형성되지 못했다. ③1985년 2월 총선에서 정치적 야당이 부활했지만 부산과 마산 지역의 민주화운동은 김영삼이라는 정치인을 중심으로 한 동원에 매몰되었고 이후 1987~88년 선거에서도 부마항쟁의 역사적 기억을 되살리려는 문제제기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이후 3당 합당의 영향으로 잊혔다. 이 교수의 말이다.
  
  “광주항쟁에 가려져 부마항쟁의 역사적 조명이나 평가가 덜 됐고 묻혀버리고 말았죠. 문재인 대통령에 의해 최근 재조명되고 있는 것은 나름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반면, 광주항쟁은 학자들 사이에서 지나치게 민중운동이나 계급혁명화의 시각으로 규정하는 것은 오히려 입지를 좁히고 기층 민중의 본질을 왜곡시킬 가능성이 높다고 봐요. 5·18에 참여한 군중은 객관적으로는 계급적이었으나 그들이 스스로 계급을 위해 싸웠는가에 대해서는 확답이 불가합니다. 그러나 요즘은 학계 내 분위기(계급혁명화)가 많이 톤다운되고 있어요.”
  
  혁명론의 경우 현실을 과장하고 왜곡시킬 우려가 있고, 완성된 형태의 혁명론 또한 경험적으로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 이 교수의 시각이다.
  
  
  8. 6월 민주항쟁과 6·29선언

한국외대 이정희 명예교수가 쓴 《한국현대정치사의 쟁점》(인간사랑 刊)

  1987년 6·29선언은 권위주의 세력의 항복 선언이었다. 전두환(全斗煥) 권위주의 정부는 정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탄압과 폭력을 동원했고 민주화를 향한 목소리를 억압해 왔음에도 전 국민적인 저항에 부딪혀 국민 앞에 항복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6월 항쟁이 뜻깊은 것은 그 성과와 함께 그 과정에서 나타난 전 국민적인 참여 때문이었다.
  
  ‘넥타이 부대’라 불리는 도시 중산층의 참여는 87년 민주화운동을 특징짓는 것이다. 산업화 과정에서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고, 어느 정도 안정된 수준의 생활을 누리는 도시 중산층으로 성장했으며, 이들이 사회의 주축을 형성하게 된 우리나라의 정치문화는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 교수는 “체제에 순응하는 묵종성의 정치문화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변화를 모색하는 참여적 정치문화로의 변화가 6월 항쟁을 전 국민적인 항쟁으로 만들었다”고 강조한다.
  
  6·29선언 이후 ‘여야 8인 정치협상’이 시작됐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이 그해 10월 12일 국회에서 의결됐다. 또 의결된 개헌안은 10월 27일 국민투표에 부쳐져 93.1%의 국민이 찬성한 가운데 새로운 대한민국 헌법이 확정됐다. 이 교수는 향후 개헌의 방향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여야 정치권 모두 개헌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으나 내각제 단계는 아니라고 봅니다. 대통령 중임제 정도는 괜찮다고 봐요. 우선 선거구제를 바꾸고 비례의석을 높여 좌·우, 중도우, 중도좌 등 4개 정당이 지역과 상관없이 만들어져 정당체제의 공고화, 3권 분립의 정상화, 책임총리제의 바탕 위에 내각제로 가야 하지 않을까요?”
  
  
  9. 민주진영의 분열
  
  개헌을 통한 제도적 민주화를 달성한 이후 남은 과제는 정권교체였다. 그러나 김대중(金大中)과 김영삼(金泳三)의 분열로 인해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결과적으로 정권교체에는 실패하게 된다. 양 김의 분열은 전두환 정권이 직선제 개헌을 결심하는 과정에서도 예견됐다는 게 이 교수의 판단이다.
  
  김대중과 김영삼 사이의 이념적인 차이는 크지 않았지만 각자가 가지고 있는 지역적 지지기반(김대중-호남, 김영삼-영남)의 분열이 증폭되었고 학생과 재야세력도 김대중과 김영삼에 대한 지지를 놓고 분열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후보 단일화 협상은 실패했고 1987년 10월 28일 김대중은 대통령 출마를 공식적으로 선언, 통일민주당을 탈당하고 평화민주당을 창당했다.
  
  결국 1987년 대선은 민주와 반민주 세력의 양자대결이 아닌 민정당의 노태우,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평화민주당의 김대중,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金鍾泌)이 나선 다자대결 양상을 보이게 됐다. 선거결과는 결국 노태우가 36.6%로 당선되었는데 김영삼이 28.0%, 김대중이 27.1%의 득표를 얻으면서 누구도 국민으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얻어내지는 못했다. 이 교수는 “6월 항쟁으로 직선제 개헌을 얻어내었지만 결국 정치 지도자들의 권력욕에 의한 분열이 6월 항쟁의 성과에 오점을 남겼다”고 결론짓는다.
  
  “DJ와 YS의 민주진영 분열은 결국 지역을 나누고 지역주의를 심화시켰어요. 이후 두 사람 모두 대통령이 되지만 5년이라는 기간을 노태우에게 넘겼다는 측면에서 보면 두 사람은 역사에 흠결을 남겼죠.”
  
  
  10. 3당 합당

1990년 1월 3당 합당 발표 당시 집권 민정당의 노태우(가운데) 대통령, 김영삼(왼쪽) 통일민주당 총재, 김종필 공화당 총재.

  당시 6공화국 노태우(盧泰愚) 정부는 매우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1987년 6·29선언 후의 첫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과 김영삼이 통합에 실패한 덕분에 3분의 1의 지지만으로 당선됐다는 사실은 정권의 출발에서부터 그 정당성과 지지기반에 대한 불안감을 노정한 것이었다. 이러한 문제점은 1988년 13대 총선에서 최초의 여소야대 국회가 탄생함으로써 더욱 심화됐다.
  
  의석의 과반수조차 차지하지 못한 최초의 집권여당이 된 민정당과 노태우 대통령은 중간선거, 5공 청산 등의 숙제를 맞았고 노사갈등, 학생운동 등의 정치적 불안요소가 더해져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또한 정기승 대법원장의 임명안 부결 등으로 야당에 정국 주도권을 빼앗기면서 고전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1990년 1월 22일 민정당 총재인 노태우 대통령, 민주당 김영삼 총재, 공화당 김종필 총재는 청와대에서 공동기자회견을 갖고 역사적인 3당 합당을 발표하였다. 이 교수의 말이다.
  
  “3당 합당으로 결국 YS가 정권을 잡고 최초의 문민정부가 들어섰지만 호남배제라는 또 다른 지역주의를 심화시키고 말았죠. 그러다 보니, 소위 이합집산이라는 현대 정치사에 아주 잘못된 현상이 나타나게 됐어요. 우리 정당체계가 보수정당이라는 한계 때문에 이합집산이 손쉽게 이뤄진 측면도 있고요. 결국 3당 합당은 보스정치, 지역정치, 보수정당에 의해 만들어진 잘못된 행태의 역사 중 하나가 됐어요.”
  
  
  11. DJP연합의 정치동력
  
  1997년 12월 실시된 15대 대통령 선거는 한국 정치사의 흐름과 관련해 몇 가지 주목할 만한 특징을 보여주었다. ①한국 정당정치 최초로 여야 간 정권교체를 이룩했다는 점 ②이러한 정권교체가 단일 정당에 의한 단독정부의 형성이 아닌 두 정당 간 연합에 의한 연립정부의 형태로 이뤄졌다는 점이다.
  
  DJP연합(김대중과 김종필)은 연합 내 두 정당이 각각 자신의 조직적 정체성을 유지한 가운데 정당 간 연합을 통해 한국 정당 사상 최초로 새로운 대안정부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점에서 DJP연합은 그동안 한국 정당정치에서 빈번하게 나타났던 전형적인 유형으로서의 정당 간 통합이나 합당(fusion)과는 뚜렷한 차이를 갖고 있다.
  
  이 교수는 “DJP연합은 군부독재 시절부터 견원지간에 정치 성향도 영 맞지 않아 보이던 두 사람이 손을 잡는 일이었기에 필연적으로 야합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제가 보기에 DJ가 JP를 농락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지역연합이 아니고서는 선거에서 이기기 어렵다는 현실적 위기의식 때문으로 봐야 합니다. 그러나 교섭단체를 만들기 위해 ‘의원 꿔주기’를 하는 등 있어서는 안 될 일들이 일어나 우리 헌정사에 얼룩이 졌지요.”
  
  
  12. 촛불집회와 박근혜 대통령 탄핵 

박근혜 대통령 파면 이후 첫 주말인 2017년 3월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 주최로 20차 범국민행동의 날 촛불집회가 열리고 있다.

  2016년 가을부터 시작된 박근혜(朴槿惠) 정부 실정에 대한 규탄의 목소리는 촛불집회로 옮아갔고, 국회는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통과시켰다. 결국 헌법재판소는 헌법수호의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박 대통령의 파면을 결정했다.
  
  이어진 대통령 선거 결과 문재인(文在寅) 정부가 출범하였다. 그리 길지 않은 기간 동안 한국 정치는 또다시 격동의 시간을 보냈다. 촛불집회는 ‘촛불혁명’으로 승격되었고 일부 성급한 이들은 새 헌법의 전문에 촛불혁명을 명시하자고 주장한다. 측근 실세 최순실 일가의 국정 농단 실체와 박근혜 정부의 무능과 실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면서 시민들은 분노했고 탄식했다. 이 교수의 말이다.
  
  “사실 촛불집회에서 촛불은 박근혜에게만 향하는 것이 아니었어요. 촛불은 가장 먼저 자기 얼굴부터 밝힙니다. 문재인 정부도 마찬가지예요. 이 촛불이 정치권 전체, 여야를 막론하고 밝히고 어둠을 내쫓는 절규로 받아들이면 앞으로 한국 정치가 좋아지고, 한국 정치사도 제대로 쓰일 것이라 믿습니다. 비교정치학적 시각에서 볼 때 한국의 경제성장과 민주화 단계는 경이로운 게 틀림이 없어요. 시민과 학생들이 한국 정치사를 비판은 하되 긍정적인 발자취도 있다는 것을 제대로 봐줬으면 합니다. 그래야 한국 정치가 나아갈 바를 찾을 수 있어요.”⊙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 월간조선 2018년 12월호 | 2018-12-17 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