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을 장례식처럼 맞이한 사람들?
- 이경섭 목사 (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범선 모양 트리 ‘범선은 기쁨을 싣고’.ⓒ부산트리축제 공식 홈페이지(http://bctf.kr)
그리스도의 탄생과 그것과 관련된 당시의 정황들은 잘 매치가 되질 않습니다. 새 생명의 탄생은 그것을 보는 이들로 하여금 축복과 생명의 환희를 느끼게 해야 하는데, 예수 탄생을 둘러싼 일련의 정황들은 그것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천사의 전언(傳言)대로, 그의 탄생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눅 2:10)”이지만, 실제로 그의 탄생 기사를 대하는 독자들은 그런 희열보다는 그것에서 오히려 ‘죽음의 냄새’를 맡습니다.
사실 예수 탄생 이전부터, 그의 죽음과 연루되지 않고 그의 탄생이 말해진 곳은 없었습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그가 세상에 죽기위해 오신 분임을 말씀했습니다(마 20:28).
그리스도가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된 후 부여된 “예수(Jesus)”라는 이름에서도 이미 그런 낌새가 차려집니다. 주의 사자에 의해 주어진 “예수”라는 이름은, 말 그대로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마 1:20-21)’라는 뜻입니다.
‘구원’이라는 말 자체는 밝고 소망스럽지만, 그 의미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진노에서 건짐을 받는 것임을 알 때 그 뉘앙스는 180도로 달라집니다.
이어 예수 탄생을 영접했던 사람들의 모습들에서 그런 뉘앙스는 계속 추적(追跡)됩니다. 아기 예수에 대한 그들의 영접 태도는 탄생의식(誕生儀式)보다는 오히려 장례의식(葬禮儀式)을 연상시킵니다.
아기 예수가 탄생한 ‘베들레헴’이라는 지명에서도 ‘죽음’이 읽혀집니다. ‘떡집(Bakery)’이라는 뜻의 ‘베들레헴(בית לחם, Bethlehem)’은 ‘산 떡(the living bread)’이신 예수가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찢어 사람들에게 내어 줄 것을 시사합니다.
사도 요한에 의하면, 예수는 자기의 살을 우리에게 먹이려고 하늘로부터 내려온 산 떡(the living bread)이었습니다(요 6:51). 따라서 예수의 ‘베들레헴’ 탄생의 의미를 모르는 자는 진정으로 성탄의 의미를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 탄생을 제대로 맞이하려면 ‘베들레헴’으로 올라가 그의 살을 먹어야 합니다(요 6:57).
예수 탄생 후 8일째 되는 날, 그의 부모가 그에게 할례(割禮, circumcision)를 시행하러 성전에 올라갔을 때, 선지자 시므온(Simeon)이 아기 예수를 안고 한 예언 역시 그의 죽음을 암시합니다.
시므온은 성령의 계시로, 탄생하신 아기 예수에게서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보았습니다.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눅 2:34-35).”
이는 장차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이 율법을 능가하는 처절한 회개의 동인(動因)이 될 것을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오래 전 선지자 스가랴(Zechariah)가 했던 예언의 성취이기도 합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슥12:10).”
십자가 대속이 죄인에게 일으킬 회개의 통석(痛惜)을 장자를 잃은 엄마의 통곡에 비유한 것입니다.
또한 하고 많은 사람들을 제쳐두고, 천군천사들이 들판에서 양을 치는 목자들에게 나타난 것에서도(눅 2:8-14) 동일한 시사를 받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주업(主業)이 목축(牧畜)이기에 흔한 직업군(職業群)을 탄생 무대에 등장시킨 것은 자연스러울 수 있습니다. 아니면 천군 천사들이 노래한,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도래할 평화(눅 2:14)“ 분위기에 일치되는, 목가적(牧歌的) 풍경이 필요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탄생을 목자들과 연루시킨 것은 그가 친히 이스라엘의 목자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마 2:6).“
그가 목자가 된다는 것은 양들과 더불어 유유자적한 삶을 일궈낸다는 뜻이 아니라,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치열한 의미였습니다(요 10:11).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의 목숨을 희생시켜 유리(流離)하는 양들을 목자인 자기에게로 돌이키셨습니다(벧전 2:22-25).
아기 예수의 ‘말구유 탄생’에 대해서도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이는 성탄 때마다 설교의 단골 주제로 등장하는바, 단지 사람들의 무관심과 냉대로 예수가 탄생할 거처를 얻지 못했다는 의미도 아니고, 혹은 낮고 천한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 아들의 겸손함을 드러낸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기 예수는 자기 백성을 위한 죄의 대속물(代贖物, ransom)로 오신 어린양이었기에(요 1:29) 말 마굿간에서 탄생한 것입니다. 어린 양이 마굿간에 탄생하는 것은 당연하며 전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또 수 천리 먼 길에서, 별의 인도를 받아 아기 예수의 탄생을 경배하러 온 동방박사들이(東方博士, Magi) 예물로 드린 황금(gold), 유향(frankincense), 몰약(myrrh)에서 탄생의식(誕生儀式)보다는 장례의식(葬禮儀式)을 봅니다.
주지하듯이, 유향과 물약은 당시 사람이 죽었을 때 시신의 부패를 방지하기위해 사용하는 장례용품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순전한 나드(nard) 한 옥합을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것을 예수님의 장사 준비라고 한 것도(막 14:3-8) 같은 맥락입니다.
그리고 왕의 진상품(進上品) 황금을 드린 것은 아기 예수를 유대인(택자)의 왕으로 영접했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의 피로 죄사함을 주는 구속주(벧전 1:1-19)께 드린 ‘믿음의 예물’을 의미했습니다.
구약에서, 피가 뿌려지는 속죄소(출 24:6)가 정금으로 되어 있음은(출 25:17), ‘그리스도의 구속과 그것에 대한 믿음’을 예표합니다. 이처럼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께 경배하며 드린 예물들에는 예수가 그들의 죄를 구속하기위해 오신 구속주라는 신앙고백이 절절히 담겨있습니다.
그러나 앞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이 모든 것 이전에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자체가 죄의 대속물이 되기 위함이었음을 이미 성경이 누누이 말씀합니다(마 20:28). 택자의 죄를 구속하려면 하나님의 2위(位)께서 반드시 육체를 입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히 10:5)”,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롬 8:3)”.
오늘 예수 탄생의 의미를 제대로 모르는 세상 사람들이나, 알아도 피상적으로만 아는 교회들이 성탄 절기에 “기쁘다 구주 오셨다”며 목청을 돋우지만, 그들은 제대로 성탄을 축하할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 성탄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려면, 목자, 베들레헴, 시므온, 동방박사들에게로 가야 합니다.
이즈음 예수님이 ‘나의 죽음을 영접하지 않은 자는 나와 무관하다’는 의미로 베드로에게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요 13:8)”고 하신 말씀이 연상됩니다.
마찬가지로, 아기 예수에게서 피의 향취(香臭)를 맞지 못하고선 제대로 된 성탄 축하를 할 수가 없습니다. 왜 이 즐거운 절기를 죽음과 연루시키며 향연(饗宴)에 재를 뿌리느냐고 타박할지 모르나, 성탄에서 예수 피의 향취(香臭)를 맡지 못하고 이 날을 단지 ‘산타클로스 데이(Santa Claus day)’로 맞는 자들은 거룩한 성탄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마지막으로, 대속주로 보내주신 예수를 오늘의 우리는 어떤 예물로 영접할까 생각해 봅니다. 첫 성탄 때에 동방박사들이 황금, 유황, 몰약을 드렸다면 우리에게는 그것들보다 더 나은 예물 곧, 그 모두를 합친 것 이상의 가치로운 예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입니다. 곧, ‘이방인들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행하는 것입니다(롬 15:16).
‘복음’에는 그 예물들의 모든 의미가 함축돼 있는 우리 신앙의 결정체입니다. 그리고 우리 봉사의 핵심도 ‘복음에의 헌신(롬 1:9)’입니다. 예수님이 구속을 완성하시고 승천하시며 유언처럼 하신 말씀도, 성령을 보내주시는 목적도 모두 ‘복음전파(마 28:18-20, 행 1:8)’로 귀결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대속을 기념하는 성찬식(聖餐式, eucharist)을 제정하시면서,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라(고전 11:26)”고 하신 말씀도 ‘복음 전도’를 통해 성찬의 의미를 구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천국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며, 인류 종말의 정점을 복음 전파의 완성(마 24:14)에 둔 것도 주목할 만합니다. 사도 바울 역시 다시 오실 그리스도에게 성도가 안겨드릴 최상의 선물도 ‘전도의 열매’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살전 2:19-20)”.
이 거록한 성탄 절기에, 여러분은 무슨 예물로 아기 예수를 영접하시려고 합니까? 할렐루야!
[출처]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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