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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보다 빠른 '디지털 속도'가 두려운 사람들

빛보다 빠른 '디지털 속도'가 두려운 사람들

이남의 기자 입력 2018.09.25. 06:00 
[디지털시대의 그림자] ③ 디지털문맹 외면하는 금융‧제도


# 김종석씨(68)는 매달 공과금과 통신비를 내기 위해 은행에 방문한다. 최근에는 집 근처 은행이 문을 닫아 시내까지 나가야 해 20분이 더 걸린다. 주변에선 ‘자동이체를 신청하라’고 권유하지만 두 눈으로 돈 내는 걸 확인해야 마음이 놓여 불편함을 감수하고 있다.
# 이용호씨(73)는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병원 신세를 지면서 대출이자가 연체된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이씨는 은행 지점을 찾아가 “대출이자가 연체된 걸 왜 알려주지 않았느냐”고 물었지만 담당직원은 “문자메시지와 스마트폰 앱으로 연체사실을 공지했다”고 답했다. 2G폰을 쓰는 이씨는 은행에서 온 장문의 메시지를 확인할 수 없었다. 
/사진=이미지투데이
디지털 기술의 발전 속도가 빨라지면서 고가의 스마트폰을 구매하기 어려운 취약계층이나 사용이 서투른 노인층이 역차별을 겪고 있다. 디지털금융 거래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이른바 ‘디지털금융 문맹’의 모습이다. 더욱이 은행 점포수가 줄어 디지털금융 문맹이 겪을 불편이 더 커질 전망이다. 빨라지는 고령화에 대비해 디지털 문맹의 문제를 해소할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75세 이상 고령자 ‘온라인뱅킹 몰라’

디지털금융 문맹은 나이가 많은 고령층에서 많이 나타난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대 74.0%, 30대 71.8%가 모바일 뱅킹서비스를 이용했지만 50대는 33.5%, 60대 이상은 5.5%로 수치가 많이 감소했다. 한국소비자원의 조사에선 75세 이상 고령자의 97.8%는 “온라인뱅킹을 할 줄 모른다”고 답변해 고령층의 디지털문맹이 심각했다.

아날로그식 금융거래를 선호하는 이들은 인터넷뱅킹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로 ‘개인정보 유출 우려’(70.9%)나 ‘안전장치 불신’(67.9%), ‘구매절차 복잡’(56.5%), ‘인터넷 사용 미숙’(37.5%) 등을 꼽았다. 디지털기기를 자유롭게 다루지 못하고 신뢰하지도 않는다. 단순히 인터넷뱅킹을 ‘몰라서’가 아니라 해킹 등 금융사고가 걱정돼 꺼리는 이도 많았다.

소득이 적고 학력이 낮을수록 디지털금융 문맹의 비중이 높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모바일결제서비스 이용비율은 대학원 이상 61.2%, 대졸 56.5%, 고졸 37.7%, 중졸 이하 4.6% 순으로 나타났다.

소득별로는 입출금내용, 자동이체 상황을 실시간으로 알려주는 모바일뱅킹 이용비율이 연간 2000만원 미만 소득자 12.8%, 2000만~3000만원 소득자 26.8%, 3000만~4000만원 소득자 32.3%, 6000만원 이상 소득자 46.6% 순으로 집계됐다. 소득이 적을수록 디지털금융 활용이 저조한 상황이다.

문제는 금융과 디지털기술의 결합, 핀테크가 우리 금융생활에 들어오면서 디지털금융 문맹들이 역차별을 겪는 점이다. 온라인과 모바일 금융거래가 적다 보니 디지털금융에서 제공하는 금리우대 등 혜택도 놓치기 일쑤다.

시중은행은 창구에서 예금상품에 가입하는 고객에게 디지털금융 고객보다 0.1~0.2%포인트 낮은 금리를 적용한다. 반대로 대출은 금리를 높게 매긴다. 발품을 팔은 이들이 오히려 금리혜택을 못 받는 셈이다. 
또한 디지털금융 문맹은 금융거래를 위해 더 오래 기다리고 더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불편도 감내해야 한다. 최근 은행들은 비용절감을 위해 점포를 줄이거나 창구 규모를 축소하고 있어 직접 은행에 방문하려면 예전보다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한다.

경제적 부담도 커진다. 앞으로 은행권은 2020년까지 종이통장을 단계적으로 폐지한다. 은행 창구에서 계좌를 개설할 때 종이통장을 만들려면 5000~1만8000원의 종이통장 발행 원가 중 일부를 발급비용으로 부담해야 한다.

조남희 금융소비자원 대표는 “모바일 거래가 확대되면서 디지털금융이 낯선 금융소외자들이 역차별을 받고 있다”며 “디지털 금융소외자의 불편을 최소화 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사라지는 점포, 디지털포용 정책 시급

디지털금융은 세계적인 추세다. 사람보다 빠르고 편리한 ICT(정보통신기술) 발전으로 선진국들은 일찍 디지털금융이 자리 잡았다.

영국과 프랑스, 일본은 디지털기술 발전으로 은행 지점이 대부분 사라진 상태다. 특히 영국은 지난해 말 은행지점이 9690개로 8년 만에 35% 줄었다. 은행 지점이 하나도 없는 지역도 40%나 된다.

하지만 급격한 점포 축소에 따른 혼란을 줄이기 위해 은행연합회(BBA)가 지점폐쇄 관련 자율규약을 제정·시행 중이다. 지점폐쇄 시 최소 12주 이전에 안내하고 지역민이 참여하는 영향평가를 시행하는 등 시장의 목소리에 귀기울인다. 일본도 은행법을 일부 개정해 고객의 지점 거래 편의성을 해치지 않는 것을 전제로 은행 점포를 운영한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씨티은행의 대규모 점포 통폐합 결정에 정치권이 은행법 개정 논의를 추진했으나 여야가 이견을 보이며 합의안을 도출하지 못했다. 금융감독원도 지난달 초 은행 지점 폐쇄절차 모범규준 마련에 돌입했지만 은행의 영업 자율성 논란으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금융전문가들은 디지털 사각지대에 갇힌 이들의 디지털금융 교육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프랑스에선 디지털정보에서 배제되는 사람이 없도록 ‘디지털 포용’ 활동에 적극적이다. 디지털 소외계층을 위해 디지털 인프라 설치 및 교육, 전문인력 양성에 보조금도 지원한다.

우리나라도 금융당국과 한국정보화진흥원이 노년층 대상의 IT교육을 진행 중이다. 더 많은 사람이 디지털금융 문맹에서 벗어나려면 민간 금융회사의 참여가 절실하다.

금감원 관계자는 “급변하는 디지털금융 환경에 고령층의 이해를 높이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라며 “금융협회와 금융기관과 함께 디지털금융 소외자의 애로사항에 귀기울이고 디지털금융 프로세스 개선에 나서겠다”고 말했다.

☞ 본 기사는 <머니S> 추석합본호(제558호·559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이남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