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예배란 거듭난 영혼이 경험하는 최고의 경험입니다. 여기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천국의 영광에 들어간 후에도 여전히 그러할 것입니다. 기도와 감사는 모두 그 합당한 위치에 놓일 때, 말할 수 없이 복된 실체입니다. 곧 기도는 우리의 부족함을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 그 필요를 아뢰는 것이며, 감사는 하나님이 그 은혜를 통해 우리를 복주신 신령한 축복을 아뢰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란 하나님의 뛰어나심과 그 완전하심을 깊이 묵상한 결과로 우리 심령이 압도된 상태에서 하나님께 직접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안식 안으로 들어가게 될 때 곧 끝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는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배만이 우리가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거할 때에도 그 충만하고, 완전한 모습으로 드려지게 될 것입니다.
예배는 여러 세대를 통해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신 그 특징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띠게 되었습니다. 족장 시대에 하나님은 "엘 샤다이" -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예배를 받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믿음으로 기다렸던 믿음의 선진들은 전능하시며, 신실하시고 미쁘신 하나님 안에서 안식 가운데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당시 예배는 가정예배 형태로, 믿음의 선진들은 가정의 머리이자, 가족들을 위한 제사장의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욥의 경우가 이에 해당합니다(욥 1:5).
이제 이스라엘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러냄을 받았을 때 큰 변화가 있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막을 통해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셨는데, 이것은 사람이 무죄상태에서나 혹은 타락한 상태에서는 결코 경험해 볼 수 없었던 더할 나위 없이 귀한 특권이자 엄청난 축복이었습니다.
이 시대의 예배는 제사장 제도를 필요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자연적인 상태에서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항상 희생제사가 드려졌습니다 (레위기서에 분명히 언급되진 않았지만). 이스라엘에게는 제사장이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거리를 두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으로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출 19:6)이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만 이것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통해 회복을 받게 될 다른 날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구약시대에 제사장들은 백성들을 대신하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제사장들은 희생제사의 피를 통해, 그리고 성소에서 여호와 앞에서 향기로운 제사를 통해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이 모든 것들은 모두 대치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휘장 뒤에 계시지 않고, 그 사랑하시는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 자신을 완전히 계시하셨습니다. 따라서 믿는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구속이 완성되었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돌아가서 지극히 높은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따라서 이 은혜의 시대에 속한 예배는 그 성격이 완전히 변경된 것입니다.
이제 요한복음 4:20~24-(우리 조상은 이 산 위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하였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여자여, 나의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 위에서도 아니고 예루살렘에서도 아닌 데서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올 것이다. 너희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을 예배한다. 구원은 유대 사람에게서 나기 때문이다.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을 살펴보면, 여기서 우리는 주 예수께서 우물가의 여인의 마음과 양심을 다루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주님은 말씀으로 여인의 양심을 찔러, 그녀로 하여금 그 추구의 대상을 예배로 돌리게 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주님은 은혜로 그 여인을 대하셨고, 예배에 엄청난 변화가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은 그리심 산을 언급했는데, 그곳은 사마리아인들이 자신들만의 헛된 성전을 자랑삼아 가지고, 유대인의 예배의식을 모방하는 장소였습니다. 그 여인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는 유대인들의 주장을 상기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여자여, 나의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 위에서도 아니고 예루살렘에서도 아닌 데서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올 것이다. 너희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을 예배한다. 구원은 유대 사람에게서 나기 때문이다.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요 4:21-24)
여기서 몇 가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먼저, 주님은 사마리아 예배방식을 완전히 거짓되고 악한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두 번째, 주님은 유대 예배방식을 합당하고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인정하셨습니다.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그리고 나서 주님은 그 두 가지 방식이 모두 폐해지게 되고 더 나은 예배가 세워지게 될 것을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참된 기독교에는 성소와 같이 예배를 위해 따로 구별된 장소의 개념이 없습니다.
단순한 이 사실을 참으로 깨닫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드문지요! 지금 이 땅에서 성소를 세우고 성소에서 예배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참된 기독교가 누리고 있는 예배하는 영혼의 기쁨을 도적질하는 사람들입니다. 아, 이것은 오늘날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수세기 동안 행해오고 있는 관습과도 같은 것입니다.
또 한가지 우리는 "아버지"를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 속에는 우리의 하나님과의 관계의 친밀함과 애정이 녹아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 하나님과 자녀의 관계를 누리고 있으며, 아들됨의 자유 속에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우리의 마음을 예배를 통해 올려드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배는 우리가 우리 죄짐으로 인해 견딜 수 없어 신음하면서, 주님께 우리의 허물과 우리 조상의 죄를 기억치 말아주시며, 우리에게 영원히 노하지 말아 주십사 하고 비는 것과는 전혀 다른 매우 복되고 더 높은 실체가 아닙니까?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복된 실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모든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알 수 없는 하나의 비밀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기 전까지는 아버지를 예배할 자격이 주어지지 않으며, 참된 예배를 드릴 영적인 상태에 이르지도 못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 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입니다. 이 말씀은 곧 예배하는 사람은 속사람이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는데 제한을 받아야 하며, 또한 하나님의 진리를 알고, 그 진리로 심령이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나 성령님이 상관하지 않는 형식적인 예배와는 완전한 대조를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예배를 받으실 리가 없습니다.
또한 아버지께서는 신령한(종교 의식적인 것과 대조되는) 예배를 기뻐하실 뿐만 아니라, 모든 예배는 반드시 신령해야 한다고 엄히 말씀하셨습니다. "예배하는 자가 (반드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must worship)." 이제는 하나님의 본성과 관련하여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예배의 본질이 완전히 계시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 -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가 무엇인지 - 이 이제 차례로 선포되었습니다. 사람이 순전히 외적인 종교의식 가운데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면, 이는 마치 하나님을 이방종교의 죽은 신처럼 하나님을 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며,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게 된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신령한 예배만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다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를 좇아 예배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배자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신분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전혀 다른 진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전체를 살펴보면, 우리 믿는 사람들을 광야의 노정(거쳐 지나는 길이나 과정.)에 있으며, 하나님의 안식을 향해 순례하는 순례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그 연약함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제사장직분을 통해 광야노정에서 도움을 받게 됩니다.
예배에 관해서는 우리가 믿음을 통해 하늘성소에 들어갈 담력과 자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예배에 대해 교훈하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우리의 하나님과의 가족관계는 분명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로서 여전히 아버지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히브리서 10:19-22(그러므로 교우 여러분(그, '형제들'),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서, 담대하게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휘장을 꿰뚫어서, 우리에게 새로운 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휘장은 곧 그의 육체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시는 위대한 제사장이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우리는 마음에다가 예수의 피를 뿌려서,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맑은 물로 몸을 깨끗이 씻었습니다.) 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지성소에 들어갈 담력(또는 자유)을 얻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 아래서 예배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휘장이 그 길을 막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휘장이 제해졌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역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기 때문에 휘장이 찢어지게 되었고, 지성소에 나아가는 새롭고 산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더군다나 우리의 양심도 정결함을 입게 되었으며, 따라서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화목된 자로서 평안 가운데 서 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단번에 드리신 영원한 제사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졌으며, 우리를 영원히 온전케 하셨음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심은 죄 문제가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해결되었다는 영광스러운 사실에 대한 증거입니다. 우리가 만일 이러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이러한 확신이 없는 사람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신분에 대해 불확실한 사람은 예배하고자 하는 좋고, 선한 의도가 있을지라도 예배를 드리기에 합당한 상태에 있지 않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육체가 찢어졌습니다. 이는 곧 십자가의 사역이 완성되었으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열렸고, 모든 믿는 자들은 거룩한 담대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의 확실한 담력(또는 자유)"은 여러 가지 면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옳고 합당하다고 여기는 어떤 상태를 정해놓고 거기에 이르지 못했다는 정죄감에 자주 빠지곤 합니다. 그러한 생각을 떨쳐버리도록 합시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우리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곧 두려움과 영혼의 떨림 가운데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든 특권은 주 예수님의 사역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에, 자주 자기 정죄에 빠짐으로써 하나님을 불명예스럽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불완전한 우리 자신의 상태에 대해 잘 알고있습니다. "양심을 항상 정결케" 하는 것이 모든 면에서 완전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육신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가 드리는 모든 예배는 하나님의 표준에 이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기대하는 수준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한 일이 죄로 인해 오게 된 것이라기 보다는, 우리의 연약함으로 인해 그러한 결과가 나오는 것으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이 필요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대제사장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드리는 모든 신령한 예배가 하나님께 받으심직 하게 드려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자신의 복된 영원한 인격과 사역의 탁월함과 및 그 생명의 향기로 더불어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의 심령에 어떠한 위로와 위안을 가져다주는지요! 누가 다음과 같은 말에 찬동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내 모든 예배에 대한 수고와 노력, 여전히 헛되고, 내가 가장 뜨거울 때 드리는 예배도 냉냉함이 감도네!" 이제 우리는 광야에서 우리의 필요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새로워진 심령 가운데 최고의 예배를 드릴 때조차도, 우리 주님을 얼마나 의지해야 하겠는지요!
22절에 보면, 우리는 아론 제사장 직분이 세워지는 절차에 대한 암시를 보게 됩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란 말씀은 희생제사의 피를 뿌리고, 회막문 앞에서 씻었던 구약시대의 예식을 기억나게 합니다. 레위기 8:6-24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피를 우리 마음에 뿌린다는 것은 새로운 출생에 대한 모형으로, 거듭남이 없이는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몸을 맑은 물로 씻었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깨끗케 되었으며, 우리를 송사할 죄가 전혀 없게된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간략하게 우리 그리스도인의 위치(또는 신분)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복된 사실에 대해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적은지요!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져온 새로운 질서의 복됨을 깨닫는 것이 너무 둔하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과거의 종교적인 편견으로 인해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덮고 있는 영적 어두움이 있습니다. 세상 종교는 주님에 의해 심판받은 유대교를 모방해 왔으며, 따라서 그러한 종교 아래서는 우리 영혼을 하나님과 더욱 거리가 멀어지게 할 뿐 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심령을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로 더욱 굳게 하시길 빕니다.
W. W. 페러데이/http://www.godswill.com.br/xe/Culto/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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