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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예배는 어떻게 드리는 것이 좋겠습니까?

예배는 어떻게 드리는 것이 좋겠습니까?




1. 삼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란 무엇입니까?

구약에서 예배라는 의미로 쓰인 단어 중에 대표적인 어휘 둘이 있는데

첫째가 ‘아바드’라는 히브리어이다. 이 말은 봉사 또는 섬김의 뜻을 가지고 있다.

두 번째는 ‘샤하아’라는 단어인데 ‘굴복하는 것’ 또는 ‘자신을 엎드리는 것’으로서 숭배, 순종, 봉사의 종교적인 개념을 갖고 있다(창24:26, 출 4:31,34:8). 곧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자주성을 버리고 그의 뜻을 따르며 섬겨야 할 존재라는 사실과 경배와 복종의 생활이 예배자들의 주요한 삶의 근본이 되어졌다는 사실이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을 때에 사용하셨던 ‘프로스퀴네오’가 있다. 이 말은 절하다, 굽히다, 입맞추다라는 뜻으로서 통치자들에게 신체적으로 굴복 또는 순종한다는 의미를 지닌 말이다. 다음은 ‘라트레이아’라는 단어인데 이는 예수님께서 유혹하는 사탄에게 ‘다만 그 분만을 섬기라’고 최종적으로 선언할 때 사용된 말로 종으로서 자신의 상전만을 섬겨야 할 신분을 확인 시키는 말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예배(worship)라는 용어는 가치(worth)라는 말과 신분(ship)이라는 말의 합성어이다. 이 말은 예배는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돌리는 것이라는 뜻이다(시편29:2). 즉, 하나님만이 경배할 대상이며 구속사의 주권적인 행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배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안에 나타난 하나님 자신의 인격적인 계시에 대한 인간들의 인격적인 신앙 안에서의 정성어린 응답이다”(Franklin M. Segler).

 

오늘의 예배자들은

첫째, 예배의 대상이시며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보여 주시고 명령하신 것, 곧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으로 나타난 행동이다.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인간을 구원한 하나님의 은총은 너무나 뚜렷한 계시이기에 구속 받은 인간들로부터 감격적인 응답을 받으시기에 가장 합당하다.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하나님의 은총과 결부시키고 그 인격적 하나님과의 연접을 형성한 사람만이 참다운 예배의 정신을 깨달을 수 있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응답의 예배를 드릴 수 있다.

 

둘째, 오늘도 우리가 간격 없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예배의 현장에 설 수 있도록 하신 그리스도인 예수님에 대한 이해이다.

그리스도의 중보적 존재 즉, 십자가 위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이 바로 우리가 드려야 할 모든 희생의 제사를 대신하신 것이기에 이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화목한 관계로 길이 열렸다(히10:14). 이러한 차원에서의 예배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앞에서는 속죄의 기쁨을, 그리고 부활의 사건 앞에서는 희생과 승리의 잔치와 같은 분위기를 갖는다.

 

셋째, 오늘의 예배를 역동적으로 움직여 가는 데 직접적으로 관여하시고 그 생명력을 불러일으키신 성령님의 기능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에 대한 이해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역사를 성자 예수님을 통하여 실현시키셨고 오순절 이후부터 주님의 재림까지는 성령님을 통하여 완성시키시고 계신다.

 

그러므로 현재라는 시점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활동을 성령님의 내적 증거를 통하여 인간의 심층으로 파고드는 자리이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리는 순간에 얻는 감동과 변화와 인도는 모두가 성령님의 역사 속에서 이룩된다. 이러한 성령님의 역사는 초대 교회에서부터 중심적으로 활동하여 이천년의 교회 역사 속에 계속적으로 동참하시고 주관적으로 이끌어 오셨다.

 

넷째, 예배자들의 가족적인 개념의 설정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가족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공동체의 실체를 이루는 것이 가장 합당한 자세이다.

 

다섯째, 예배에는 연속성과 확산이 있어야 한다. 예배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응답이라는 차원에만 머무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예배자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시는 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한 예배의 생활화를 통하여 연접된 그리스도의 흔적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계속 되어야 한다.

 

 

2. 우리가 예배드리는 대상에 대하여 논하십시오.

우리가 예배드리는 대상은 우상이 아니다. 일반적인 종교들이 어떤 특정한 인간이나 사물을 섬기는 실례를 많이 보아 왔는데 이런 유의 대상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신의 형상이나 개념의 표현일 뿐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잡다한 개념에 하나님 자신이 놓이는 것을 용납지 않으신다(출20:1-3). 우리의 예배는 예배의 대상인 창조주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대로 피조물이 순종할 따름이다. 즉, 그의 부르심과 은총의 계시가 창조와 구속의 역사 속에 먼저 나타났기에 거기에 응답적 행위로 감사와 경배와 찬양을 드리게 된다.

 

다시 말하면,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들로 하여금 예배를 드리도록 명령하심에 따라 그대로 순종하는 절대적 행위이다. 그러기에 어떤 경우일지라도 예배의 주체는 인간이 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 자신이시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응답하는 추종자들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한 명령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예배를 드리는 피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예배는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응답이라는 의미는 예배를 통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는 자신의 생명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게 되었다는 ‘구원 받은 기쁨’의 응답적 표현을 말한다.

 

이때 구원을 깨달은 기쁨의 응답은 결코 피동적 행동으로 나타날 수 없고 감사와 감격에 충만케 된 능동적 화답으로 표현된다. 이런 자발적인 구속의 기쁨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드러나게 될 때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은 그 예배자의 신령과 진정의 상태를 아시고 그 예배를 받으신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요14:6).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단번에 희생 제물이 되신 사건은 하나님과 인간의 직접적 관계를 가로막은 상징으로 수천 년간 존재해 왔던 성소의 휘장을 갈라놓았다.

 

 이로부터 그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면 영원히 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죽는다는 진리가 새로운 계약의 차원에서 선포되었다. 이제는 예배자 스스로가 찾아 나서서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 대 진리를 기뻐하고 감격하며,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부복하여 찬양과 경배와 감사를 드려야 한다는 새로운 질서를 제시하여 준다.

 

 하나님은 지금,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새 계약과 함께 예배의 질서를 세우시고 방황하는 현대인을 부르고 계신다. 이러한 인격적 하나님이 곧 예배에서 섬겨야 할 대상이 되고 있으며, 그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예배자들은 참 평화와 새로운 경험을 갖게 된다.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은 막연한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셔서(히9:14) 인격적으로 존재하시는 분이다. 그는 예배자들의 주님으로서 그들의 삶의 방향과 내용을 주관하시며 그들의 경배를 받으신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절대적 존재이시며 세상의 주관자로서 오늘도 우리의 예배에 임재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임재 속에 그 분과의 만남이 예배에서 이룩되어야 한다. 예배 속에 임재 하시는 하나님은 예배자들의 심성을 다 아시는 분이시며(행1:24, 롬8:27)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요구하신다(요4:23).

 

하나님은 예배자들을 가까이 부르시며(사1:18, 약4:8) 그들을 위한 존재가 되기를 원하신다(롬8:31-39). 그리고 과거와 현재 속에 예배자들을 위한 계약(3:16)의 이행을 변함없이 고수하신다(말3:6).

 

이처럼 하나님은 예배의 대상으로서 독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 유일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을 깨달은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을 섬기지 않을 수 없으며 당연히 그에게 영광과 경배와 찬양을 드리면서 예배의 깊은 의미를 계속 새겨 가야한다.

 

3. 칼빈이 사역하던 교회에서는 어떻게 예배를 드렸습니까?

칼빈은 마틴 부처, 존 낙스 등과 함께 종교 개혁 당시 카톨릭 미사를 대부분 계승한 루터교의 문제점과 지나친 개혁을 주장한 쯔빙글리와 재세례파의 입장 차이를 최대한 좁힌 예배 예전을 개신교의 예배 속에 이행함으로써 사실상 개혁교회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칼빈은 성찬성례전과 말씀을 예배의 구심점으로 하고 회중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의식을 갖춤으로서 초대 교회의 복음적 예배 의식에 접근 했으며 교회의 전통적 감각을 살리는 예배 예전을 마련하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예배의 두 중심점을 설교와 성례전에 두고 새로운 예배를 구상하기 시작했는데 그는 간편한 예배 순서 속에서 초기 교회가 가졌던 내용을 살리는 예배를 마련하기 원했으며 이 일을 위해서 진력한 것도 사실이다.

칼빈은 마틴 부처가 사용했던 예전에 약간의 수정을 가한 채 예배의 의식을 갖추게 되었다. 예배로 부름, 용서를 위한 기도, 설교, 중보의 기도 등을 보완하고 대신 자비의 연도(키리에 엘레이손)나 영광송 등을 생략한 것을 제외하고는 부처의 형식을 거의 그대로 사용했다. 그러나 성찬 성례전의 중요성을 철저히 인식하여 매주일 거할 것을 주장한 점은 그의 신학에 근거한 특성이기도 하다.

 

그가 1542년에 펴낸 ‘초대 교회의 예전의 내용을 연구한 예식서’ 에 나타난 예배의 형태와 순서는 말씀의 예전과 만찬의 예전을 함께 거행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예배의 말씀으로 시작해서 죄의 고백이 따르고 속죄를 위한 기도, 운율을 넣은 시편송, 성령님의 임재를 구하는 기도문, 성경 봉독 그리고 설교로써 말씀의 예전이 먼저 있고난 다음 만찬의 예전이 뒤따랐다.

 

우선 구제를 위한 헌금의 순서가 있었고, 중보의 기도, 해설을 첨가한 주님의 기도, 성물의 준비, 노래로 사도신경을 암송하고, 성찬 제정사, 권면, 성찬기도, 성체 분할, 분병 분잔, 성찬 참여, 성찬 후 기도, 축도(아론의 강복 선언)의 순서로 예배를 끝맺게 되어 있다.

 

예배로의 부름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예배드리는 분위기를 형성하는 순서인데 칼빈은 성구 낭독으로 이 순서를 시작했다. 그는, 기도란 말과 노래로 표현 되는데 교회의 음악은 주된 기도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예배 가운데 사용된 찬송을 가리켜 하나님을 우러러 찬양하고자 하는 뜨겁고 열렬한 열심과 더불어 인간의 가슴을 강렬하게 움직이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음악적 이해를 가지고 부르심에 응답하는 순서로써 찬양과 경외의 시간이 있었다.

 

일명 목회기도라고도 불리는 중보의 기도는 칼빈을 비롯한 많은 개혁자들에 의하여 계속되어 왔던 중요한 예전의 순서였다.

이 기도는 예배 인도자가 하나님 앞에 모여 예배드리는 무리를 위하여 사제의 기능을 펴는 부분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탁 받아 섬기고 살피는 책임을 가진 목양자로서 그들이 살고 있는 정치, 경제, 문화적 상황에서 발생된 죄와 모순의 용서와 전쟁, 질병, 가난과 억눌림의 세계로부터의 해방을 간구했다.

 

루터와 같은 개혁자는, 시편에 운율을 넣어서 찬송처럼 불렀던 것을 더 발전시켜 민속 가요곡을 사용한 찬송의 도입을 시도했는데, 칼빈은 그와 반대로 초대 교회처럼 운율을 넣은 시편만을 예배의 찬송으로 고집하면서 일체의 세속적 곡조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사용되는 것을 거부하였다.

 

말씀 봉독 전에 기도 순서가 있었는데 당시의 이 기도는 설교자가 기도서에 모아져 있는 훌륭한 기도문을 읽는 것으로 대치되었다. 실질적으로 칼빈은 이 기도의 비중을 무겁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말씀 중심의 신학을 소유한 그가 이 말씀이 선포되는 순간에 성령님의 강한 손길에 그 과정과 결과를 맡겨야 한다는 깊은 신앙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말씀의 예전 가운데 고백의 기도를 제외하고는 말씀의 시작과 끝에 갖는 기도를 가장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그는 설교를 끝내면서 반드시 기도를 드렸는데 그는 이 기도 가운데 지금껏 자신을 도구로 삼아 전달한 메시지에 대하여 성령님께서 뿌리셨으니 계속 가꾸시고 결실을 맺게 해 주실 것을 부탁하는 내용을 담았다.

 

초대 교회의 예전을 최대한 살리려고 했던 칼빈은 성물을 드리는 봉헌 행위는 생략했지만 필요한 성도들을 위하여 예배 가운데서 물질을 하나님의 존전에 드리는 순서는 계속하였음을 본다.

 

축복 기도의 근원은 구약에서부터 시작되어 오랜 역사성을 가지고 있는 예배의 순서인데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사역을 위탁 받은 사람들, 그것도 모든 시간과 정신을 온전히 바쳐 주어진 사명에 전념하는 종들에 의해서만 선포되는 것이 바로 축도라고 말했다.

 

축도의 근본 취지는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고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무리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중심한 생활을 강조하고 하나님을 위한 사명적 존재로서의 삶을 위한 복의 선언에 있기 때문이다.

 

 

 

 

4. 개신교 교회에서 예배 순서는 어떠한 것이 좋습니까?

개신교의 예배 가운데서 지켜져야 할 내용과 의미는 실로 다양하다. 그것은 교파와 신학의 바탕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교파는 반예전적인가하면 어떤 교파는 경험 위주의 신앙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에 그 내용들이 결코 일치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예배 가운데 진행되는 순서의 그 개체 의미만큼은 필수적으로 파악하고 있어야 함이 예배자나 예배 인도자의 책임이라 하겠다.

 

1) 오르간 전주

이것은 예배의 첫 순서로서 헝클어진 마음을 정리하고 새로운 정신을 가다듬는 시간이다. 전주는 15분 전에 시작하며 마지막 4분을 남겨 놓고 조용한 음으로 돌아와 교회 안에 장중한 침묵이 흐르도록 하며 2분전에 연주가 끝나면서 목사와 찬양대의 입당과 연결을 맺는다.

 

2) 예배로 부름

성구 낭독으로 시작하며 예배 분위기를 형성하는 순서이다. 예배 인도자는 회중을 직접 보면서 가급적 여기에 사용될 성구를 외워서 장엄하면서도 뚜렷한 발음으로 사용해야 한다. 교회의 절기에 따라 언제나 신선한 하나님의 말씀이 예배자들에게 선포됨으로써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의 예배 현장에 임재 하심을 알도록 해야 한다.

 이 말씀의 선언이 끝난 후 이어서 찬양대의 응답송이 있게 된다면 그 의미는 더욱 실감을 갖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3) 기원

기원이란 짧은 기도로서 오늘의 예배 속에 성령님으로 임재하신 하나님의 권능과 현존을 예배 인도자와 회중이 깨닫도록 해달라는 단순한 기원의 성격을 띠고 있다.

오직 하나님의 높으신 경륜만을 감사하고 성령님의 임재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만을 구할 뿐이다. 이 기도는 많은 교회에서 찬양의 찬송 다음에 두는 경향이 많다.

 

4) 찬양과 경배의 찬송

예배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라는 준엄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모두가 일어서서 응답하고 그 하나님을 찬양하는 순서이다. 이 때 부르는 찬송은 반드시 하나님을 향하여 드리는 경배와 찬양의 뜻이 담긴 찬송이어야 한다.

그 대표적인 찬송은 ‘다 찬양하여라’(21장), ‘거룩 거룩 거룩’(10장), ‘기뻐하며 경배하세’(13장)와 같은 찬송들이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예배 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일어서서 죄인 된 자신들을 거룩한 존전에 예배 하도록 불러주신 그 하나님을 우러러 보면서 찬양으로 응답하는 것으로 참으로 귀한 의미가 있다.

 

5) 성시교독

교독문이라고도 부르는 이 부분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부분에 속한다. 시편에 곡을 붙여 찬양하는 순서는 구약에서부터 이어지는 중요한 순서였는데 루터 때부터 시작된 토착적 감각의 찬송가들이 시편송의 자리를 차지하는 결과를 낳았다.

 

예배의 오랜 전통이었던 시편의 외면과 단절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운율을 붙여 노래하는 것 대신에 시편 자체를 회중에 의해 읽혀지게 되었는데 그로인해 시편교독이 예배 순서에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편 교독의 근본정신을 모르는 교회들이 여러 성경 구절을 배열하여 성시교독으로 바꿔 버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6) 고백의 기도

이 죄의 고백이 있어야 할 근거는 하나님의 거룩한 존전에 서 있는 실존으로부터 부끄러운 자아의 모습을 드러 내놓고 거기에 하나님의 용서와 임재를 간구하는 예배하는 공동체의 고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기도는 경험 위주의 신앙을 주장한 19, 20세기 부흥 운동의 주역들에 의해 오랫동안 예전 가운데서 사라졌던 순서인데 예배 회복 운동이 19세기 말부터 일기 시작하면서 고백의 기도 순서에 대한 가치성이 다시 일기 시작했다.

 

7) 용서의 말씀

고백의 기도에 대한 답으로 성경에 기록된 용서의 말씀을 들려준다. 이는 하나님은 죄를 고백한 자녀들을 용서 하신다는 확신을 갖게 한다.

 

8) 영광송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인간의 응답으로서 하나님을 향하여 그 위대하심과 자비하심을 찬양하는 순서이다. 용서 받은 기쁨 속에는 성부, 성자, 성령 되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모든 영광을 돌리는 회중의 감사와 기쁨의 표현이 담겨 있다.(찬송가 4장, 5장, 6장)

 

9) 중보의 기도

일명 목회기도라고도 불리는 이 기도는 예배 인도자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돌보는 책임을 갖고 있는 목양자로서 그들의 죄 용서를 구하고 그들의 눌림과 고통에서 해방 받기를 아뢰고 구하는 기도이다. 이토록 중요한 순서가 회중을 대표하여 장로들이 맡게 되어 버렸는데 그러한 기도는 교회 예배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10) 말씀 봉독

지금까지는 모두가 하나님께 드리는 인간의 찬양, 감사, 경외와 고백의 행위들이었지만 이제부터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응답해 주시는 순서이다.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예배를 통하여 가장 분명하고 풍부하게 응답해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이다. 하나는 기록된 말씀의 봉독과 또 하나는 설교자를 통한 말씀의 선포와 해석과 적용이다. 이 두 가지는 개신교 예배의 극치를 이루는 부분이다.

 

11) 찬양대의 찬양

오늘의 예배 가운데서 찬양대가 맡은 역할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 중에서도 설교 전에 부르는 찬양은 하나님을 향하여 가장 아름다운 경외를 드리는 부분이며 예배자들의 마음을 하나님 앞으로 끌고 가는 헌신의 경험을 주는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이들은 음악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교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회중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게 하는 사역을 담당하고 있다.

 

12) 설교 전 기도

이 기도의 본래적 의미는 말씀을 선포하기 전 성령님께서 임재하시어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시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마음에 순종하도록 해달라는 기도이다.

그 날에 적당한 내용의 기도문을 사용하기도 하며 설교자가 말씀의 사역과 결과를 성령님께 부탁하는 기도를 짧게 할 수도 있다.

 

13) 설교

설교란 예배 가운데서 봉독한 하나님의 말씀을 회중에게 다시 그들의 언어로 해석해 주고 그들의 생활 속에 구체적으로 현장화 시키는 것을 주목적으로 한다. 설교는 회중의 신앙의 초점이 언제나 하나님의 구속사건 속에 모아지도록 해야 한다.

설교의 내용은 언제나 예배의 내용과 일치하도록 노력해야 하며 예배 가운데서 외쳐진 설교는 은혜의 도구여야 하며 정한 시간을 준수할 줄 알아야 한다.

 

14) 설교 후 기도

성령님의 도움으로 뿌려진 이 말씀의 씨앗을 성령님께서 가꾸고 결실 맺도록 하여 하나님의 의와 그 나라를 이루시라는 간결하면서도 간절한 부탁을 하는 것이어야 하며 또 다시 설교를 하는 듯한 인상을 주면 안된다.

 

15) 감사와 응답의 찬송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은총에 지체없이 감사의 표현을 하는 예배자로서의 실천적 행위를 보이는 순서로서 진행 되도록 해야 한다. 응답의 찬송이나 신앙 고백으로서의 사도신경을 가져도 좋다.

 

16) 봉헌

봉헌의 의미는 예물의 드림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 앞에 성도들이 드리는 응답적 행위를 총칭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정성을 다하여 경청한 무리들이 스스로 우러나는 감사의 응답으로 내어놓는 모든 마음과 정성의 표현이다.

 

17) 강복 선언(축도)

구약에서의 축도는 제사장 아론의 계열에서만 있도록 했는데 이 축도에서는 하나님이 주어로 되어 있다(민6:24-26). 신약에서는 성삼위 일체 되신 하나님의 기능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기에 축복 선언 내용도 구체화 시킬 수 있었다(고후13:13).

이 축도 후에 찬양대의 응답송 그리고 반주자의 후주로 예배를 마치게 된다.

 

5.주일날 예배시에 시행하는 기독교 세례와 성찬식에 대하여 기록하십시오.

1) 세례 성례전

칼빈은 이 성례전을 가리켜 ‘하나님에 의하여 그의 자녀로 삼으시는 거룩한 인침이며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접붙임으로서의 새로운 출발’이라고 말했다.

 

첫째, 세례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사람이 되는 결정적 사건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공적으로 시인하고 그 분과의 연접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성례전이기 때문이다.

 

둘째, 세례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것과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예전이다.

 

셋째, 세례란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탄생을 의미한다.

 

넷째, 세례는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이 되게 하는 의식이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섬기는 사람들의 일원이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공동체의 삶을 확인하는 것이어야 한다.

 

세례의 사상이나 사역은 일찍이 구약의 유대 민족의 종교 생활 가운데 이미 존재하였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나 거룩한 예전에 참여할 때는 반드시 물로 깨끗이 씻는 의식을 가졌다.

 

이것은 죄와 더러움을 씻어 보이는 의식으로 강조되었다. 쿰란 공동체에서도 이 의식을 시행 했으며 유대교로 개종하는 이방인들에게도 베풀어졌다.

세례 요한의 사역은 세례를 통해 회개 운동으로 나가는데 역점을 두었다. 이 세례는 곧 예수님 사역의 기점이 되었으며 그 후 기독교 공동체의 특수한 의식으로 집례 되어 온 소중한 성례전이 되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의 행적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선포하기 위함이었으며 하나님의 분명한 음성을 통하여 만인에게 예수님의 신분을 확인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를 통하여 예수님은 성령님의 역사 속에서 자신의 사역이 출발됨을 알리게 되었으며 그 후의 사역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기적과 함께 계속 전개 되었다.

 

예수님은 이 세례에 대해 그 분의 십자가 고난이 자신과 교회를 위하여 받으셔야 할 세례 행위임을 시사하고 있다(롬6:3). 또한 부활하신 후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도록 최종적인 명령을 하셨다(마28:19-20). 그러므로 이 세례성례전은 주님의 명령에 의한 예전이며 위탁 받은 무리들의 최우선적인 사명의 현장이라고 말하게 된다.

 

초대 교회에서도 사도들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고 영접한 것이 확인 될 때 세례를 주었다(행8:16). 이 세례를 통하여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자격과 함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바치고 복음 전파를 비롯한 교회의 봉사자로서 그 출발을 다짐하는 의미가 있었다.

 

이러한 의미의 세례는 일반적인 예배 가운데서 진행될 수 있는 평범한 순서가 아니다. 먼저 세례를 받아야 할 후보자들의 신앙과 행위가 검증되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는 최소한 한 주일 또는 두 주일 전에 교인들에게 알려서 후보자들이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주어야 한다.

 

반드시 성찬성례전을 겸해야 하는 규정은 없으므로 세례만을 독자적으로 집례할 수 있다. 세례의 의미를 전 주일부터 설교 가운데 언급함으로 의미를 되새기는 기회로 삼도록 하며 유아 세례만을 가질 경우에는 설교 전에 행함이 좋다.

 

이름을 부를 때 착오가 없도록 준비하고 목사는 교단의 예식서나 예배 모범에 규정된 질문을 하는 것이 좋다. 목사는 세례를 준 후에 회중에게 또 하나의 질문을 필수적으로 해야 한다. 이것은 새 식구를 받아들이는 회중과의 약속이다.

아울러 세례를 주는 방법과 시기는 다양하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웨스터민스터 신앙 고백’에서는 ‘합법적으로 안수 받은 복음의 목사가 물을 가지고 성부의 이름과 성자의 이름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푼다’ 고 규정해 놓았다.

 

이러한 전통에 의하여 세례의 집례는 안수 받은 목사에 의하여 집례 되도록 대부분의 개신교의 교회들이 결정하여 시행하고 있다.

 

2) 성찬성례전

초대 교회로부터 성찬은 예배의 중심적 순서였다.

이 성례전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공동체인 교회는 지금까지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눈으로 보고 직접 참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다시 한 번 경험하게 되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세례를 받은 즉시 성찬식에 참여했고 이를 통해 그들 모두가 한결같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아멘으로 화답하는 생활을 계속하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초대 교회의 성찬 성례전이야말로 깊은 감격과 생명력을 지닌 예전으로서 예배의 핵심적인 부분이 되었다.

 당시 예전의 모든 주제는 십자가 위에서 희생하시고 부활하셔서 성찬성례전의 현장에 임재하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었으며 이 예전에 참여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와의 만남이요, 그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보여 주신 하나님의 은총과의 만남이라는 생동적 신앙을 갖게 해주었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교회는 일년에 한두 번으로 이 성례전을 치루고 또한 그 내용의 이해나 실천에서 빈약함이 너무 뚜렷하다. 바로 여기에서 한국 개신교회에서는 성례전에 대한 바른 이해와 신학적 의미의 발굴을 서둘러야할 필요성이 있다.

 

성찬 성례전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성례전의 하나이다. 이 전통의 기원은 주님께서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시기 전날 밤, 곧 잡히시던 밤에 그의 제자들을 모으시고 유월절의 명절을 지켰던 저녁식탁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실질적으로 성례전의 참된 의미는 성찬성례전을 제정하신 주님의 말씀과 행위에서 이것을 무슨 뜻으로 어떻게 주셨는지를 깨닫는데 있다.

 

a) 봉헌

봉헌이란 말씀의 예전이 끝난 후 성찬성례전을 거행할 떡과 포도주, 그리고 사람들이 준비한 예물이 식탁 위에 드려지는 순서를 말한다. 이 때 목사와 장로가 떡과 포도주를 옮기는 것이 바르고 정중한 태도라 하겠다.

 

b) 감사와 성별의 기도와 에피클레시스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봉헌된 떡과 포도주에 복을 내리사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와 연합되도록 성령님께 간구한다. 중보기도 뒤에 주님의 기도를 드린다. 에피클레시스는 성령님의 임재를 청원하는 기도로 주님의 살과 보혈의 의미를 수찬자들에게 심어 주기를 원하는 기도이다.

 

c) 성례전 말씀

일반적으로 고린도 전서 11:23-26의 말씀을 선포한다. 단순한 말씀의 선포와 짤막한 해석,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감사하면서 거리낌이 되지 않는 삶을 지속할 것을 부탁한다.

 

d) 성체 분할과 분병 분잔

성찬성례전의 가장 극적이고 존엄한 순서로 주님께서 떡을 떼시고 잔을 들고 제정의 말씀을 하신 것을 그대로 따라 한다. 집례자 자신이 먼저 떡을 들고 다음에 분병 위원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한다. 그들이 모두 받아먹은 다음에 회중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주님의 살과 피를 받은 몸이 이 예전을 거행해야 되기 때문이다.

 

e) 일반적인 준비

이를 위해서는 집례자인 목사, 위원들 모두가 준비와 자세가 철저하고 진지해야 한다. 또한 성물의 준비가 철저해야 하는데 포도주는 반드시 물을 섞어서 사용한다. 이는 갈보리 산에서 피와 함께 심장 속의 물까지도 흘리셨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다. 포도주를 쓰는 경우에는 알콜을 증발시킨 것을 사용함이 좋다 하겠다.

 

이 성례전이 기독교 예배 예전의 극치를 이루는 부분이라고 볼 때에 그 예전의 집례란 실로 소중한 것이다. 그러므로 집례자는 최대한 유의하여 경건하게 집전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성령님의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새로워지고 성도들의 신앙은 계속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6. 주일 날 예배 때 목사님의 설교가 어떠했으면 좋겠습니까?

개신교 교회의 설교 비중은 교회가 예전을 멀리 하면서 더욱 커지게 되었으나 현재 교회의 예배가 마치 이 설교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처럼 되는 현상에 대해서는 깊은 우려가 된다.

 

목사의 설교가 교회의 부흥을 좌지우지 하고 성도들은 선포된 말씀에 대해서도 비판의 칼날을 세우며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 버리는 기이한 풍토까지 조성이 된 것은 교회의 예배가 균형을 잃고 감동을 주지 못하는 예식이 되어 버린데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설교자로서 목사의 자세를 생각해 본다.

본인이 말씀을 준비할 때 학식이나 해석에 의지하게 되어 인간적이고 경험적인 설교를 하게 되면 성도들의 가슴 속에서는 감동이 일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 안의 자녀들은 한 성령을 모신 자들로서 영적 유기체이기 때문이다. 그런 설교는 교양강좌나 책을 통하여서도 얼마든지 그리고 더 나은 수준에 접할 수 있는 것이다.

성도들이 목사의 개인적인 학식의 자랑이나 경험을 들으러 교회에 가는 것은 절대 아니다.

특히 예화를 고를 때 조심해야 될 것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예화를 사용해서 성도들이 난감할 때가 종종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예화는 사실 설교자의 일상생활 속에서 발견한 영적 깨달음을 전달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럴 때 성도들은 자신도 겪고 있는 일상에서 미처 깨닫지 못한 진리를 찾아내는 설교자의 따뜻한 눈길에 감동하게 된다.

 

이 감동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한 준비로서 마음의 문이 열리게 되며 성도들로 하여금 설교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한다. 그렇다고 해서 먹는 이야기나 물건을 사들이는 일, 또한 가족 이야기들 속에서 자주 예화를 끌어내는 분들이 있는데 이것은 도움보다는 설교에 부정적인 반응을 일으키게 되는 사항들이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운반하는 자로서 적절한 해석과 적용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역동적으로 성도들에게 임하도록 하는데 진력해야 한다. 얕은 말재간이나 성도들에게 아부하는 설교, 또한 반대로 자신의 계산에 따른 분노의 표현등은 예배의 흐름을 끊어 버리게 되고, 설교자는 물론 듣는 성도들의 마음에도 평안을 심지 못하게 됨으로 가장 조심해야 될 부분이다.

 

예배의 대상이 분명히 하나님임에도 불구하고 때로 예배의 주체에 혼동이 올 때가 있다. 지루하게 이어지는 설교의 주제가 모호할 때이다. 어느 분은 신학의 정리가 되질 않아서 다른 교단의 교리나 심지어는 자유주의나 이단의 교리까지 넘나드는 분들이 있다.

 

예배 시간은 언제나 정확하게 시작 하지만 끝나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는 것은 설교 시간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은 농경시대가 아니고 시간을 쪼개어서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시간이란 금과 같은 것이다.

예배시간의 편성은 이미 설교자에게 충분히 배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어기는 것은 설교자의 횡포라고 볼 수 있다.

 

 설교는 30분 이내에 끝내도록 함이 좋겠다. 시간 내에 설교를 끝내는 것도 설교자의 노력과 기술이다. 음성까지 완벽하면 듣는 성도 입장에서 바람직하겠지만 타고난 음성을 가다듬기가 어려우려니와 특히 표정까지 굳어 있다면 설교자 본인의 고충이 심할 것이다.

 

하지만 노력하는 모습이 보인다면 오히려 약점이 강점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설교 중에 상스런 말이나 또는 강한 사투리를 여과하지 않고 내뱉을 때 설교의 효과는 경감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설교자나 듣는 자 모두가 같은 지향을 가지고 예배에 임하는 것이다.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택하신 은혜에 응답하는 태도를 가지고 예배에 임할 때, 설교자는 더욱 열심히 성실하고 경건하며 정중한 태도로 강단에 설 것이며 또한 듣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 화답하는 태도로 임하게 되어, 우리는 예배 속에 임재하신 성령님의 놀라우신 움직임이 감동으로 다가오는 경험을 갖게 될 것이다.

베드로 2009.06.19 10:30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임마,누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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