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후기, 세도정치가 판을 치고 탐관오리가 날뛰던 시절을 살았던 다산 정약용은 시를 읊어도, 나라를 걱정하고 세상을 아파하면서 부정과 비리에 분노하는 시를 많이 지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한가하고 안온한 기분에 젖어 아름다운 경치를 만날 때는, 세상의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뛰어난 서정시나 서경시도 수없이 읊었습니다. 특히 자신의 고향이던 풍광이 뛰어난 두물머리 일대에 대한 시들은 정말로 아름답고 실물경치를 구경하는 듯한 묘사의 시들이 많았습니다.
북한강 남한강의 물이 겹쳐 흐르는 곳 汕濕交流處 마을 이름이 두물머리네 邨名二水頭 마을 입구의 점방 주인 늙은이가 當門一店  버티고 앉아 가는 배를 보내네 堅坐送行舟
배를 타고 부모님의 산소가 있는 충주를 찾아 성묘를 가던 강행시(江行詩) 75수 중의 한 수입니다. 18년의 귀양살이를 마치고 57세의 중늙은이로 고향에 돌아온 다산, 그 다음 다음 해에 형님을 모시고 오랫동안 찾지 못한 부모님의 산소를 찾아 남한강을 따라 충주로 가던 때의 시입니다.
고향에서 충주까지는 물길로 300리, 강을 따라 널려진 아름답고 기이한 경치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75수의 시로 멋지고 아름답게 읊었습니다. 곳곳의 지명에 얽힌 설화들도 인용하고, 이름난 마을의 유래나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도 빠짐없이 거론하면서, 경치도 읊었지만 역사적 사실도 읊었던 역사기행의 시이기도 했습니다. 출발하던 고향마을 근처의 경치를 빠짐없이 시에 담았고 300리의 뱃길이 끝나는 충주에 이르러 하담(荷潭)이라는 곳의 부모님 산소에 오른 '상묘(上墓)'라는 별도의 시로 끝냈습니다.
벼슬살이 하던 때에도 틈만 나면 고향에 찾아와 여러 형제들과 함께 천진암에서 노닐었고, 수종사에도 올라 형제간의 정도 나누었지만, 둘째, 셋째 형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오직 큰 형님 한분이 노인으로 생존하여 함께 배를 타고 가던 성묘길은 쓸쓸하면서도 잊을 수 없는 여행이었습니다. 묘소에 올라 느끼는 감회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해줍니다. 묘소 주변의 나무는 싱싱하게 자라는데 자식들은 나무보다 못하여 세상에 버림을 받는 신세가 되었다고 한탄하는 대목에 다산의 서러움이 배어 있습니다. 그렇다 해도 다산의 강행시 75수는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이 아름다워 다산이라는 시인의 면모를 짐작하기에 충분한 시입니다. 요즘은 양수리(兩水里)라고 부르지만, 다산은 두물머리(二水頭)라고 표현한 부분도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박석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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