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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모음/다산 칼럼 모음

다산의 믿음을 무너뜨린 일본(日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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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믿음을 무너뜨린 일본(日本)


다산은 일찍부터 국제적 안목이 대단한 분이었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중국을 통해 들어온 천주학을 접하면서 서양의 과학사상에 흠뻑 빠져 개명한 논리를 터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도서집성』같은 책에서 「기기도설」의 원리를 제대로 파악하여 ‘기중기’, ‘거중기’, ‘녹로’, ‘활차’ 등의 기구를 개발할 수 있었고, 기하학의 높은 이론을 알아내 지렛대와 도르래의 원리까지 밝게 알아낸 기술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일본의 유학자들이 저술한 경학 관계 책들을 읽어본 뒤에는 ‘왜’라고 천시했던 일본이 아니라 학문이 매우 ‘정예(精銳)’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찬양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아들에게 보낸 편지인 「시이아(示二兒)」라는 글에서는 백제를 통해 학문을 배워가던 일본이 중국과 직접 교류하면서 좋은 서적들을 모두 구입해가서 연구를 계속한데다, 과거(科擧)제도라는 나쁜 제도가 없는 덕택에 창의적인 학문을 했던 이유로 문학(文學)이 우리나라를 멀리 뛰어넘었으니 ‘매우 부끄럽다(愧甚耳)’라는 표현까지 사용했습니다. 그러면서 다산은 「일본론(日本論)」이라는 두 편의 논문을 통해, 그만한 학문과 문학의 수준에 이른 나라이니 이제는 이웃나라를 침략하거나 노략질하는 야만에서 벗어났으며 일본에 대해서는 안심해도 된다는 판단까지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렇다면 다산은 ‘양이(洋夷)’라는 서양, ‘왜이(倭夷)’라는 일본에 대하여 전혀 편견을 지니지 않은 포용력이 큰 학자였음에 분명합니다. 이른바 세계화 마인드를 일찍부터 지녔던 학자라는 평을 들을 만한 분이었습니다. 1836년 75세로 다산은 세상을 떠났고, 서양의 과학사상이나 일본의 경학에도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면서 74년이 흐른 1910년, 일본은 끝내 다산의 믿음을 배반하고 조선을 침략하여 멸망시키고 말았습니다.

최근 일본 수상의 방한으로 우리나라 대통령이 다산이 일본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는 화두를 꺼내 세상의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일본 학자들의 문장이나 학문이 훌륭하다고 생각한 다산의 판단이 무색하게, 노략질과 침략의 근성을 버리지 못했던 과거사도 대통령이 한마디 언급했다면 더 훌륭한 화두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다산의 방대한 학문분야는 역사적으로 큰 오류가 많지 않은데, 오직 일본에 대한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학자들의 지적에 답하는 뜻에서라도, 이제라도 일본은 전쟁범을 숭배하는 신사참배 문제와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는 망상에서 벗어나기를 다산의 이름으로 경고하고 싶습니다.

박석무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