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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기타/여행

계절의 바뀜은 매혹적인 기적

                                                                                               조선일보 Waple Club에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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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서 가까운 이 깊은 밤
천지를 울리던 우레 소리들도 이젠
마치 우리들의 이마에 땀방울이 걷히듯
먼 산맥의 등성이를 넘어가나 보다


역시 나는 자정을 넘어
이 새벽의 나른한 시간까지는
고단한 꿈길을 참고 견뎌야만
처음으로 가을이 이 땅을 찾아오는
벌레 설레이는 소리라도 귀담아 듣게 되나 보다


- 박성룡 ‘처서기(處暑記)’


두보(杜甫)는 가족과 떨어진 채 전란에 치여 떠돌다 47세 때 성도(成都)에 이른다. 그는 가족을 불러모아 장강(長江) 지류 완화계(浣花溪)가에 땅을 얻고 완화초당(草堂)을 짓는다. 집이라야 이름처럼 소박한 초가여서 비만 오면 띠 지붕이 샜어도 생애에서 가장 달콤한 2년 반의 휴식이 이때부터 시작된다. 그의 시도 평온하고 부드러운 정취로 바뀌어 읽는 사람까지 편안하다.


‘맑은 강 휘어 마을 안고 흐르고(淸江一曲抱村流) 긴 여름 강마을 일마다 한가롭다(長夏江村事事幽)/ 제비는 멋대로 처마를 나들고(自去自來梁上燕) 갈매기는 가까이 가도 날아갈 줄 모르네(相親相近水中鷗)/ 늙은 아내는 종이에 바둑판을 그리고(老妻畵紙爲棋局) 아이는 바늘 두드려 낚시를 만든다(稚子敲針作釣鉤)….’ 완화계 시절 명편 ‘강촌(江村)’엔 시간이 멈춰버린 듯 정밀(靜謐)하고 긴 여름 낮이 있다. 가을이라기엔 아직 이르고 여름이라기엔 너무나 신선하고 맑은 오후, 여름의 끝이다.


‘8월 중순을 지나면 갑자기 가을 기운이 느껴지는 날들이 있다. 날은 선선하고 햇빛은 유달리 밝고 찬란하다. 아직 따갑지만 한결 부드러워진 여성적 빛이다.’ 윌리엄 포크너는 이 빛을 제목 삼아 장편 ‘8월의 빛’을 썼다. 주인공 조 크리스마스는 살인을 저지른 대가로 거세된 뒤 평화롭게 주변을 응시한다. 욕정과 폭력이 뜨겁게 난무하는 삶의 복판 여름을 지나 생의 언저리, 가을의 초입에서 인생을 지혜롭게 보는 눈을 얻는다.


‘처서 가까운 이 깊은 밤/ 천지를 울리던 우레 소리들도 이젠/ 마치 우리들의 이마에 땀방울이 걷히듯/ 먼 산맥의 등성이를 넘어가나 보다// 역시 나는 자정을 넘어/ 이 새벽의 나른한 시간까지는/ 고단한 꿈길을 참고 견뎌야만/ 처음으로 가을이 이 땅을 찾아오는/ 벌레 설레이는 소리라도 귀담아 듣게 되나 보다/… // 처서 가까운 이 깊은 밤/ 나는 아직은 깨어 있다가/ 저 우레 소리가 산맥을 넘고, 설레이는 벌레 소리가/ 강으로라도, 바다로라도, 다 흐르고 말면/ 그 맑은 아침에 비로소 잠이 들겠다// 세상이 유리잔같이 맑은/ 그 가을의 아침에 비로소/ 나는 잠이 들겠다.’
 - 박성룡 ‘처서기(處暑記)’


8월 하순의 처서는 글자 그대로 더위(暑)를 치워 들어앉힌다는 절기(節氣)다. 처서는 “땅으론 귀뚜라미 등에 업혀 오고 하늘로는 뭉게구름 타고 온다”고 했다. 처서엔 “모기도 입이 비뚤어져 모진 성화를 그친다”고도 했다. 파리, 모기 사라지고 귀뚜라미가 하나 둘 나오기 시작한다.


지난 여름은 유난스럽게 모질었다. 장마 끝난 뒤로도 게릴라성 호우니 국지성 호우니 하는 물폭탄을 쏟아부었다. 8월 들어 보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비가 오느라 서울의 하루 평균 일조(日照) 시간이 한 시간밖에 안 됐다. 비가 와도 서늘하지 않고 되레 후텁지근해 한반도에 아열대 우기(雨期)가 닥친 게 아니냐고들 걱정할 지경이었다. 그 ‘우울(雨)’한 날들이 겨우 그친 뒤엔 때아닌 폭염이 처서 지나도록 열흘 넘게 이어졌다. 여름내 하늘을 원망하던 해수욕장들은 폐장을 늦추고 밑진 여름 장사를 그나마 끝물에야 조금 만회했다. 개학을 연기하는 학교들도 잇따랐다.


하긴 그 맹렬하던 여름의 화염이 게눈 감추듯 그저 한순간에 사그러들지는 못할 것이다. 오규원은 ‘8월이 담장 너머로 다 둘러메고/ 가지 못한 늦여름이/ 바글바글 끓고 있는 뜰 한켠’(9월과 뜰)이라고 노염(老炎)을 노래했다. 백거이(白居易)도 ‘남은 더위에 객을 청하다(殘暑招客)’에서 ‘누가 늦더위 씻어주리오(誰能淘晩熱) 간간이 두어 잔 술을 마시네(間飮兩三杯)’라고 읊었다.


그래도 거스를 수 없는 것이 계절이다. 어느 순간 창문을 닫고 자야 하는 서늘한 밤이 거짓말같이 찾아들었다. 그 혹독한 무더위가 언제였나 싶게 보송보송한 자리에서 사람들은 모처럼 깊은 잠을 누렸다. 유리잔처럼 말간 서울 하늘을 보면서는 찬탄과 함께 좌절도 맛보았다. 우리가 그간 얼마나 혼탁한 속에서 숨쉬고 살아왔나를 새삼 깨닫는 좌절이다.


하늘은 쪽빛으로 짙게 물들어간다.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기운이 찾아든다. 태양은 이미 노한 얼굴을 거두었다. 눈에 띄게 쇠(衰)해졌다. 별안간 덧없이 천지가 쓸쓸해졌다. 그렇다고 허무한 것도 아니다. 사찰, 포구, 간이역 같은 곳이 가고파진다. 늘 오고가는 것이긴 해도 계절의 변화보다 매혹적인 기적도 드물다.


가을 햇살은 수채화처럼 모든 것을 투명하게 칠한다. 햇살은 경춘선 철로변 호수에 떠서 고기 비늘처럼 은색으로 빛난다. 고즈넉한 산사(山寺)의 마당, 야트막한 시골 돌담을 어루만진다. 번잡한 도시라 해도 가로수 이파리 사이로 살랑이듯 반짝인다. 가을 햇살은 비스듬하다. 정수리를 수직으로 사정없이 내리쬐던 여름 햇빛과 달리 가슴을 나지막이 편안하게 비춰 온다. 그래서 가을 햇살은 일 없이 쪼이고 싶어진다.


‘…세상엔 지금 햇볕이 지천으로 놀고 있다 햇볕이 아깝다는 뜻을 아는 사람은 지금 아무도 없다 사람아 사람아 젖어 있는 사람들아 그대들을 햇볕에 내어 말려라 햇볕에 내어 말려 쓰거라 끊임없이 살려내거라 놀고 있는 햇볕이 스스로 제가 아깝다 아깝다 한다.’
- 정진규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


시인은 쓸모 많은 가을 햇볕을 예찬한다. 고추며 옥수수, 토란대도 말리고 참깨도 털고 콩도 타작하고…. 가을 햇살은 도무지 버릴 것 하나 없이 귀하다. 말릴 것이 그뿐일까. 여름 내내 눅눅해진 책이며 옷가지를 볕에 내다 말리는 쇄서포의(書曝衣), 포쇄(曝)의 시절이다.


‘…가을 되어 긴긴 장마 개고(時秋積雨霽) 서늘한 기운 들판에서 들어오네(新凉入郊墟)/ 등불을 점차 가까이 할 만하니(燈火稍可親) 책을 펴 보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簡編可卷舒)/ 어찌 아침저녁으로 생각하지 않으리(豈不旦夕念) 그대들 위해 세월을 아끼라(爲爾惜居諸)/ 사랑과 의리는 서로 어긋나는 것(恩義有相奪) 시를 지어 망설이는 자들에 권하노라(作詩勸躊躇).’


한유(韓愈)가 아들에게 독서를 권하며 쓴 장시 ‘부독서성남(符讀書城南)’의 끝 구절이다. 흔히 가을을 ‘등화가친의 계절’이라고 하는 게 여기서 나왔다. 날씨 서늘하고 하늘 맑으며 수확 풍성해 마음이 편안하니 공부하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이라는 말이다.


이부자리 말리듯, 여름내 눅눅하던 몸과 마음도 보송보송하게 말리고 싶다. ‘마음을 내려놓아라’는 불가(佛家)의 가르침, 방하착(放下着)의 시절이기도 하다. 여름내 지고 온 탐욕이며 분노, 어리석음을 잠시 내려놓고 마음을 가볍게, 정신을 맑게 할 만하다. 깨달음의 저 언덕으로 건너가는 완전한 성취, 도피안(到彼岸)까지는 아니라도 미혹한 중생들의 차안(此岸)을 응시할 수만 있어도 이 무렵 계절 바꿈은 위대하다.


‘이젠 그만 푸르러야겠다/ 이젠 그만 서 있어야겠다/ 마른풀들이 각각의 색깔로/ 눕고 사라지는 순간인데/ 나는 쓰러지는 법을 잊어버렸다/ 나는 사라지는 법을 잊어버렸다// 높푸른 하늘 속으로 빨려가는 새/ 물가에 어른거리는 꿈// 나는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 조태일 ‘가을 앞에서’

 

오태진/조선일보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