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구한 반만년의 역사(歷史)를 자랑하는 우리 민족. 그러나 찬란한 문화 전통의 역사가 무참하게 짓밟힌, 그로 인해 역사의 줄기가 단절되어 버린, 바로 일제(日帝)에 의해 질곡(桎梏)의 굴레를 지게 된 치욕(恥辱)의 날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단절된 역사를 복원하고 일제(日帝)의 잔재를 청산하고 있다 하면서도 가장 기초적인 문제인 용어의 사용이나 은폐된 친일 민족반역자들의 진상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 자신들의 무의식과 무관심은 민족의 장래를 제대로 일구어내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먼저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과 '한일합방(韓日合邦)'이라는 명칭에 대해
이의(異議)를 제기합니다.
무엇이 '보호'입니까? 일제(日帝)가 우리를 보호한 것입니까?
강압에 의한 치욕적인 조약. 그렇다면 우리가 조약 명칭에 '보호'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을사오조약(乙巳五條約)'이나 '을사조약(乙巳條約)'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이 명칭 역시 우리의 치욕을 풀기에는 부족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명칭이 맞을까요.
바로 '을사륵약(乙巳勒約)'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당시부터 우리의 민족적 지식인 들은 이렇게 불러왔습니다.
'늑약(勒約)'은 억눌러서 이루어진 조약이라는 의미입니다.
곧 을사년(乙巳年)에 일어난 강압에 의한 치욕의 조약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한일합방(韓日合邦)'이라는 명칭도 '합방(合邦)'의 의미가 나라가 합쳐졌다는
일제(日帝)의 입장에서 불리던 명칭입니다.
이 역시 경술년(庚戌年)의 나라의 치욕{국치(國恥)}이라는 ' 경술국치(庚戌國恥)'로
불려야 합니다.
아울러 '경술국치(庚戌國恥)'의 국치일(國恥日)이 몇 월 며칠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일반인이 얼마나 될까요?
1910년 8월 29일. 을사오적(乙巳五賊)의 한 인물이었던 매국노 이완용(李完用)과
당시 일제의 데라우치 통감 사이에 조인되어 발표된 치욕의 날, 8월 29일입니다.
과거는 돌아갈 수는 없어도 잊혀지는 것은 아닙니다.
일본(日本)의 소학교(小學校) 학생들의 교육용 한자(漢字)의 수가 1945자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생각해 본다면 우리의 무의식의 소치는 부끄럽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명칭의 문제 보다 우리가 더욱 분명하게 확인하고 실천해야 하는 것은
은폐된 친일 반민족행위자들의 역사적 청산 작업일 것입니다.
일제(日帝)가 우리를 강점(强占)했던 기간 동안 자신의 영달과 치부를 위해 친일
부역을 했던 친일 반민족행위자들이 광복 후에도 친일(親日)에서 친미(親美)로
옷만 갈아입고 반공(反共)의 허울을 쓰고 당당하게 전면에 나서 공포의 칼날을
휘둘렀고, 지금까지 사회 각계에서 그 막강한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
과연 우리가 정말 진정 독립이 되었는가를 반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국 분단(分斷)의 아픔과 함께 우리 사회가 왜곡된 역사관으로 정도(正道)와는
거리가 먼 반민족적이고 비민주적인 작태들이 행해지는 근원에는 일제 압제와 친일
잔재가 내재되어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청산하고 바로잡지 않고서는 우리는 완전한 해방과 광복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반드시 역사적 단죄까지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1910년 8월 29일 경복궁에 일장기가 걸린 날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함성이
울려 퍼질 때까지 34년 11개월 10여일의 기간은 분명 반만년 유구한 우리의
역사를 단절시킨 씻을 수 없는 기간임은 분명합니다.
우리 민족의 암울한 치욕(恥辱)의 시기, 반만년 역사를 단절(斷切)시킨 수치(羞恥)의
역사. 그러한 치욕(恥辱)과 질곡(桎梏)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지금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일제(日帝)로 인해 만들어진 모든 것들 중에서 잊어야 할 것과 잊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잘못 알고 잘못 쓰고 있는 것들에 대해 바로잡는 작업이
선결되어야 진정으로 일제(日帝)의 잔재(殘滓)가 사라질 것이고 민족의 정기(精氣)가 올바로
설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