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길의 과학여행수첩 (8) | ||||||||||||
![]() 궁예의 도시, 태봉의 수도였던 철원.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는 송악에서 이곳으로 도읍지를 옮긴 후 나라이름을 태봉을 바꿨다. 그의 수하에는 고려를 세운 왕건이 있었다. 이정표를 보고 달리는데 여정에 없던 궁예가 상념 속으로 파고들며, 1100년 전 한반도에서 가장 극렬한 혼란을 겪었던 곳으로 시간여행을 나서라고 유혹했다.
궁예를 지우고 차를 세운 곳은 아름다운 한탄강 계곡을 내려다볼 수 있는 승일교. ‘콰이강의 다리’를 연상케 하는 아치 모양의 이 다리는 1948년 북한이 소련식 유럽공법으로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공사는 중단됐고, 이곳을 수복한 남한이 다리의 나머지를 완성한 사연을 갖고 있다. 비록 시차를 두었지만, 전쟁 중에 남한과 북한이 함께 만들었다는 점이 아이러니컬하다. 이승만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이름에서 각각 ‘승’과 ‘일’자를 따온 것은 누구의 발상일까. 남이든 북이든 철창신세를 질 도발이다. 50여 년 전 철원은 귀신만이 살아있는 아수라장이었다고 한다. 김일성고지, 피의 능선, 백마고지에서 6만명의 동포가 서로 총부리를 겨누다가 흘린 피는 철원평야를 덮고 한탄강 계곡을 넘치게 했다 한다. 그러나 승일교 아래를 유유히 흐르는 한탄강은 말이 없었다. 발길을 옛 노동당사가 있는 곳으로 돌릴까 하다가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승일교 옆에 새로 낸 한탄대교를 넘는 순간, 분단은 역사가 아니라 끝없이 계속되고 있는 현실임을 깨달은 것이다. 처음에는 군인이 한둘 보이더니, 잇따라 포성이 울려왔다. 그리고 얼굴에 검정을 칠하고 중화기로 완전무장한 군인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등허리로, 바짓가랑이 사이로 참다만 오줌줄기처럼 굵은 땀줄기가 흘러내리는데도 그들은 쉬지 않고 걸으리라.
문득 6월 들녘을 수놓은 개망초의 속삭임을 읽었다. 농부에겐 귀찮기만 이 잡풀의 꽃말이 ‘화해’라지. “가까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게 해주고, 멀리 있는 사람은 가까이 다가오게 한다”는.
6월의 무거움을 지우고, 승일교 곁에 있는 고석정으로 발길을 옮겼다. 조선의 의적 임꺽정이 강 위에 우뚝 솟은 고석바위에서 숨어 지냈다 하여 유명한 곳이다. 그러나 역사는 더 올라가, 신라의 진평왕과 고려의 충숙왕이 놀던 유서 깊은 곳이다. @imt4@ 고석정 아래에는 이번 한탄강 답사의 목표가 됐던 바위들이 무리지어 나타났다. 용암이 식다가 만들어낸 곰보 바위들이다. 곰보 바위는 용암이 급히 식어 생긴 현무암의 한 특징이다. 용암 안에 녹아있던 기체들이 압력이 낮은 대기를 만나면서 터진 것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들 가운데에는 물이 깊고 검은 돌이 마치 벌레를 먹은 것과 같으니, 이는 대단히 이상스러운 일”이라며, 한탄강을 답사한 소감을 적었다. 한탄강 유역은 한반도에서 지질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신생대 제4기에 백두산, 한라산, 울릉도 등지에서 화산활동이 일어나던 때, 철원의 한탄강 유역도 용암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한반도에서 보기 드문 현무암층을 만들었다. 다만 제주도와 달리 얇은 현무암층 밑에 화강암이 받치고 있어 수분이 빠져나가지 않아 농사가 잘 된다고 한다.
고석정에서 아래로 좀더 내려가면 한탄강의 지류인 대교천을 만난다. 현무암의 주요 특징인 주상절리(柱狀節理)가 일품인 곳이다. 주상절리는 글자 그대로 기둥 모양으로 바위들이 분리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주상절리는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생각해봐. 용암이 급격하게 식으면 균열이 생길 것이야. 그러면 떨어지는 덩어리들은 가장 완벽한 공 모양의 형태를 갖추겠지. 그런데 주변에서 압력이 가해지면 빗면이 생기고 결국 벌집 모양의 형태를 갖출 수밖에 없어.” 정 선배는 작은 구슬들이 모인 스티로폼을 손으로 누르는 시늉을 하면서 육각형, 오각형 같은 도형이 생기는 원리를 설명해 주었다. 오랜 편집자 생활을 거쳐 ‘과학 오디세이’, ‘속담 속의 과학’ 같은 책을 내면서 과학작가로서 걸어가는 정 선배의 손에 잡히는 설명이었다. 멋진 현무암 주상절리를 선보이고 있는 대교천 계곡은 한반도 제4기 지질 및 지형에 대한 자료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최근 천연기념물로 보호받고 있다. 그런데 한탄강 댐을 건설하려는 계획이 있어 환경단체의 반대 목소리가 높다.
주상절리의 백미는 재인폭포에서 만날 수 있다. 재인폭포는 철원이 아닌 연천의 한탄강 가에 있다. 3번 국도를 따라 전곡에서 연천으로 올라가는 길에 통현삼거리(보람식당)에서 우회전하여 6km 정도 들어가면 재인폭포 주차장이 나온다. 높이가 20미터쯤 되어 보이는 재인폭포는 옛날 줄타기를 잘했던 재인(才人)에 대한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천한 놈이 아름다운 아내를 얻었던 게 화근이었다. 아내를 탐한 이 마을의 사또가 재인에게 높다란 폭포에서 줄타기를 시켜놓고는 밧줄을 끊었던 것이다. 그런데 묘한 상상력이 발동한다. 당시 밧줄을 묶었다면 나무나 바위였을 것이다. 그리고 밧줄을 묶기 좋은 주상절리가 먼저 눈에 띄었을 것이다. 나무였어도 상관없다. 뿌리는 주상절리 틈에 내리고 있었을 터니까. 그렇다면 재인의 죽음을 부른 것은 밧줄이 끊어져서가 아니라 밧줄을 묶었던 뿌리가 떨어져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 재인의 전설은 실제 일어난 사건이었지 않았을까. 사또는 물론 재인도 폭포 밑에 떨어져 나온 돌이 즐비하게 쌓여 있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결국 재인은 죽음을 알고 눈물을 흘리며 줄을 탔을 것이고, 사또는 이를 보며 입가에 잔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만약 이게 시나리오라면 기막힌 과학소설이다. 그런데 재인폭포의 주상절리를 보면서 대지의 전율을 느꼈다. 주상절리들은 마치 죽순이 자라듯 바위틈을 비집고 삐쭉하게 튀어나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몇 놈이 폭포 아래로 떨어지고, 그 뒤를 다시 다른 놈들이 밀고 나왔다. 대지의 탄생은 여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지하에서 올라온 용암이 흐르다가 굳고, 다시 갈라지고 부서지면서 점점 작은 돌멩이와 모래 알갱이가 변해가는 그 시초가 아닌가. 필자소개 과학동아 기자, 디지털타임스 경제과학부장, 동아사이언스 과학문화연구센터장을 거쳐, 현재 과학 전문 쇼핑몰 '사이숍(www.scishop.kr)'과 ‘IT월드 정보과학체험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는 ‘아마추어 천문가 길라잡이’, ‘앗, 우주가 나를 삼켰어요‘, ’꿈틀대는 11억 인도의 경제‘가 있다. | ||||||||||||
/홍대길 (주)사이유 대표 hong@sciu.co.kr | ||||||||||||
2007.06.28 ⓒScience Tim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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