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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기타/여행

모리셔스, 바람도 파도도 달콤한 휴식을 꿈꾸는 곳


모리셔스의 첫 느낌은 달콤함이다. 사탕수수밭에서 퍼져나온 달콤함이 섬 위에 맴돌며 기분 좋은 휴식을 선물한다. 모리셔스 동쪽 일로세르 섬의 오후. 하얀 모래 위로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시게 밝다.

가볍게 숨을 내뱉으며 나직이 읊조려본다. “모리셔스(Mauritius)”.

4개의 음절이 혀와 잇몸을 스다듬으며 희롱하듯 굴러간다. 그곳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세상인지 알기도 전에 그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이미 마음은 달콤한 소리의 유혹에 사로잡혀 버렸다.

모리셔스는 인도양에 있는 작은 섬나라. 독특한 식생의 섬인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의 우측으로 인도양의 한복판에 한걸음쯤 나아간 곳에 있다. 제주도와 비슷한 크기의 동그란 모양의 섬 주위는 산호가 중간중간 띠를 두른 아름다운 바다이고, 내륙은 삐죽 솟은 기암괴석의 봉우리들이 이룬 산자락과 사탕수수가 온통 뒤덮은 너른 평원이다.

7,000만년 전 바다 위로 우뚝 솟은 이 섬을 7~10세기 아랍의 뱃사람들은 지도에 ‘디나아로비(Dina Arobi)’로 적고있다. 유럽인들중 처음 이섬을 방문한 이들은 16세기의 포르투갈인. 그들은 이 섬을 ‘백조의 섬(Ilha do Cirne)’이라 불렀다. 1598년 네덜란드인이 찾아와 자기 나라 왕자의 이름을 따 지금의 ‘모리셔스’란 이름을 붙였고 섬에 촌락을 만들어 거주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의 섬은 뱃사람이 지나치는 무인도였을 뿐, 모리셔스에 사람이 살고 문명이 시작된 것은 채 400년이 되지 않는다.

자연의 섬에 사람이 주인행세를 시작하자 많은 것이 달라졌다. 네덜란드인들은 이 섬을 동인도회사 거점인 인도네시아 자바섬을 위한 공급기지로 삼았다. 도도(DoDo) 등 생물이 멸종됐고 거대한 흑단나무 숲이 파헤쳐졌다. 대신 그들은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데려왔고 자바에서 사슴과 담배, 사탕수수를 들여왔다.

18세기 초 섬의 주인은 프랑스인으로 바뀌었고 지금의 수도인 포트루이스(Port Louis)가 만들어졌다. 19세기 초 제국의 치열한 다툼 속 섬은 다시 영국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흑인 노예 대신 인도와 중국 등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유입됐고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은 더욱 확장됐다. 모리셔스가 자신들만의 목소리를 내며 독립한 것은 1968년이다.

길지 않은 역사는 모리셔스가 식민의 땅이었고, 노예의 땅이었고, 착취의 땅이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섬의 풍경에선 눈을 씻고 봐도 처연한 역사나 절망을 볼 수 없다.

이 섬에 아프리카에서, 인도에서 수많은 사람을 불러들인 것은 사탕수수다. 지금 모리셔스 들판에는 한국의 늦가을 억새가 꽃을 피우듯 사탕수수의 부수수한 꽃이 피어나 수많은 붓의 놀림으로 바람을 그려대고 있다.

사탕수수 잎을 휘감으며 달콤해진 바람이 일렁이는 섬, 모리셔스. 사각사각 사탕수수밭을 스친 바람소리는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바다로 안내한다. 설탕같이 하얀 백사장, 달콤한 푸른빛의 청명한 하늘. 그 백사장 위에서 그 하늘을 담고있는 바다이니 그 물빛 또한 달콤하다.

모리셔스 문화의 아이콘은 ‘믹스(Mix)’다.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가 한데 부대끼고 어울려 살아온 섬이다. 리조트에서 만난 악샤다씨에게 한국인에게 고향을 묻듯 힌두인지 크리올(Creoleㆍ아프리칸계 혼혈인)인지 어줍지 않은 질문을 던졌다. “글쎄요. 딱 뭐라 이야기하기 힘듭니다. 할아버지는 아프리카에서 오셨고, 어머니는 인도에서 오신 분이고….” 사람도 문화도 너나 구별 없이 서로를 섞어가며 하나를 이루는 것. 그것이 모리셔스다운 것이다. 마치 달콤한 트로피컬 프루츠 펀치처럼.


모리셔스=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입력시간 : 2007-0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