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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관리/CEO

'잃어버린 10년'...그 허구성

언제부턴가 조금 유식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잃어버린 10년’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10년 동안 대한민국이 허송세월 했다는 얘기다.
 

 진지한 학술대회에서도, 보통사람들의 술자리에서도 이 말은 어김없이 나온다. 특히 보수 인사들이나 한나라당에서는 ‘잃어버린 10년’은 거의 숙어가 돼있다. 

 

 하긴 열린우리당 김근태 의원이 당 의장 시절 “민주개혁세력은 민주주의 진전을 이뤄냈지만 먹고사는 문제에서는 무능했다. 잃어버린 10년 이었다”고 반성했을 정도니 보수인사들이나 한나라당이 이를 거론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정말 지난 10년은 잃어버린 세월이었을까. 노무현 대통령 임기 내내 어수선한 상황이 전개됐기 때문에 정서적으로는 그런 느낌도 든다. 그러나 정서와 사실은 엄연히 다르다.

 

 우선 ‘잃어버린 10년’의 의미를 짚어보자. 원래 ‘잃어버린 10년’은 1990년대 일본 경제의 장기침체를 일컫는 말이다. 1980년대 말 거품 경제가 붕괴되면서 주식과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고 그 여파로 수많은 기업과 은행들이 도산했다. 일본은 그 이후 10년 동안 0%의 성장률을 기록하는 등 어둡고 음울한 시절을 지냈다. 

 

 대한민국의 지난 10년은 어떤가.

성장 동력이 약화된 것은 분명하지만 그 나름의 성과는 있었다. 무엇보다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기를 극복했다.

당시에는 과연 10년 이내에 IMF 체제를 졸업할 수 있을지, 어두운 전망과 좌절이 범람했다. 카드 위기나 알짜기업의 헐값 매각이라는 결과론적인 문제점은 있지만, 한국은 짧은 시간에 IMF 체제에서 벗어났다. 남북관계도 우여곡절은 있지만 과거와는 차원이 다른 평화구도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내내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수치상으로는 외환보유고 세계 5위, 수출 3,000억 달러 돌파, 1인당 GDP 2만 달러, 주가지수 급상승 등의 성과도 있었다.

물론 반기업 정서의 횡행, 투자 부진, 심각한 청년 실업, 부동산 가격 폭등은 불안감과 우려를 낳게 하고 있다. 그러나 국민들이 정서적으로 느끼는 노무현 정권의 무능과는 달리 통계만을 놓고 보면 “망했다”는 식의 혹평은 다소 과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잃어버린 10년’이라는 말은 세상을 휘저으며 진실인양 자리 잡고 있다. 그 저변에는 민주화 세력이 무능하기 때문에 보수세력이 다시 집권해야 한다는 논리가 깔려있다. 보수 언론도 이 논리를 통해 보수 집권의 당위성을 노골적으로 전파하고 있다.

 

 보수세력의 집권 그 자체가 잘못된 일은 아니다. 국민 지지를 받으면 당연히 집권해야 한다. 하지만 오도된 논리로 혹세무민하는 것은 교정돼야 함이 마땅하다.

 

 무엇보다 ‘잃어버린 10년’이라는 말에는 그 10년 이전에는 아주 좋았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 이전의 시기에 한국 경제는 음습한 정경유착과 무분별한 과잉투자로 모래위의 성이었다. 남북관계는 북한 관계자의 불바다 발언 하나로 온 나라가 흔들거리고 라면 사재기가 이루어질 정도로 불안했다.

 

 보수세력이나 한나라당의 주장이 그 시절로 돌아가자는 것인지 명쾌하지 않다. 그저 국민 정서를 자극, 노무현 정부의 실정을 극대화하고 민주화세력을 무능한 집단으로 전락시켜 정권을 잡겠다는 심리전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나라당의 집권 가능성이 높아질수록 우려되는 점이 있다. 한나라당이 집권 후에 어떻게 하겠다는 비전이나 국가전략을 제시한 적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은 주요 정책을 놓고 “노(NO)”라는 말을 주로 했을 뿐이다.

좌파나 민주화세력에 대한 증오는 컸지만 나라의 미래에 대한 믿음직한 전략은 보이지 않는다.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을 지냈던 박세일 서울대 교수가 ‘선진화’라는 국가전략을 내놓기 전에는 보수세력은 지난 10년간 변변한 국가적 아젠다를 제시한 바 없다.

중소기업 육성이나 생산적 복지, IT 산업의 육성, 포용정책,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등 지금의 국가전략은 모두 민주세력이 내놓은 것들이다.

 

 사람들도 워낙 살기가 힘든 탓인지 그저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갑자기 살기가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마치 도참설이나 기복신앙을 보는 것 같다.

그러나 불행히도 한국 경제의 어려움은 어느 날 갑자기 해결되기 힘든 구조적 측면을 안고 있다.

국내외적 경제여건을 잘 아는 사람들이 “지난 10년은 허송세월한 시기”라고 주장하며 “민주화세력만 쓸어내면 나라가 잘 될 것”이라고 얘기한다면 그것은 사기다.

 

 말하는 사람도 좀더 신중해져야 하고 듣는 사람들도 차분하고 냉정하게 따져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