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기념하라”고 하시는 말씀에 대하여(고전11:23-26)
예수,코리아 2021.03.18 05:39
우리가 자주 시행하는 성찬은 주님이 친히 제자들과 제정하신 것으로 교회가 마지막 날까지 지켜야 할 규례입니다
누구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는 자들은 이 성찬에 참여해야 하며, 성찬을 통해서 예수님을 기념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찬에 참여하면서 예수님을 기념해야 한다고는 알고 있지만 무엇을 기념해야 하는지, 그리고 기념한다고 하는 것은 또한 무엇을 말씀하는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사실 종교개혁자들이 몇 가지 성경에 일치하지 못한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성찬에 대한 신학적 입장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위대한 교사인 루터의 가르침 그대로 그리스도께서 성찬식 가운데 육체로 임재 한다고 하는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종교개혁이 500년 전에 일어났지만 여전히 한국교회는 성찬에 대한 이해를 온전하게 가르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나를 기념하라”고 하시는 그 말씀대로 성찬을 통해 예수님을 기념하라고 하는 성찬에 참여하고는 있지만 정작 성찬에 참여하는 자들은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기념하는지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단지 성도들은 성찬식에서 떡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살과 피로 상징하기 때문에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므로 주님을 기념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찬이 이것 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떡과 포도주가 단순히 예수의 살과 피를 상징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특별한 일들을 기념합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첫돌을 기념하고, 결혼을 맺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결혼을 기념합니다. 또한 부모나 사랑하는 이가 먼저 세상을 떠나는 날도 기념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나를 기념하라고 하는 이 말을 우리 한글 성경이 완벽하게 표현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 살과 피를 먹고 나를 기념하라고 하는 그 의미를 제대로 성도들에게 전해주지 못한 것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추억과 추모, 그리고 기억과 기념이라고 하는 이 말을 다 같은 의미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어 성경만 보더라고 예수님께서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자들에게 “나를 기억하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 더욱 원어 성경에서 “기념하라”고 하는 이 단어(아남네신 이라는 헬라어)는 “기억”이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므로 기념하라고 하는 이 말과 기억하라고 하는 이 말은 같은 뜻으로 볼 수 있지만 사실 또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그리고 일반적으로 느끼는 대로 단지 기념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기념이라고 하는 이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을 기념하라고 하면 그 일을 마치고 나면 끝나는 것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 기일을 정하고 기념하는 것과 같은 것이 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자신을 기념하라고 하시는 이 말씀은 일 년에 한두 번 성찬을 통해 나를 기념해주기를 바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만약 오늘날처럼 성찬을 단순히 세상에서 기념하는 것처럼 같이 이해한다면 우리는 성찬을 바르게 시행하고 있지 못하는 것입니다.
떡과 포도주를 통해서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만 회상하고 이해하고 수납하는 것은 혼인 약속의 징표인 반지만 갖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결혼할 당사자가 그 반지를 끼고 있다고 해서 결혼을 하는 것이 되고, 반지가 없다고 해서 결혼을 하지 않은 관계가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단지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것을 기념하는 것으로 알고 받는다면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고 하는 것 만을 기념하라고 한다면 (사실 이러한 성경 해석이 성도들에게 만연하여 성도들은 성찬식 때 단순히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았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어디 까지나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은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개인적인 느낌과 생각을 주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성도가 성찬에 참여하면 예수님의 고난 받으시는 것을 회상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물론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고난이 자신을 위해 받으시는 고난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러나 성찬의 의미는 단순히 개인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찬에 참여하면서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는 것을 자세하게 들여다 본 다면 지금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과 그리고 우리들에게 새 언약을 맺고 있다고 말씀하여 주십니다. 이것이 성찬이 갖는 참된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본질보다는 본질을 이루고 있는 주변의 것에 더 관심을 가집니다. 결혼 당사자의 혼인 관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다는 결혼식에서 사용되는 옷과, 꽃과 반지 등에 온 통 관심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성찬도 이와 같습니다. 성찬은 참여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한 느낌과 깨달음을 준다는 것보다 더 큰 표를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새 언약 백성이라고 하는 관계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실 때 그 때마다 동물의 희생의 피를 통해 제사를 드리고 언약을 서로 맺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새 언약을 이루시기 위한 모형입니다. 이제 주님은 자신의 피로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과 새 언약을 맺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결혼을 하기 위해 그 징표로 결혼 반지를 서로 주고받습니다. 반지를 꼈을 때는 서로 쌍방 간의 약속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로 새 언약을 맺을 실 때는 예수님 자신만 고난을 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새 언약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살과 피를 떡과 포도주로 대신하여 먹고 마시는 자들에게 실제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과 마시는 것처럼 예수님의 죽으심에 참여하는 것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향해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하는 것을 고백하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언제 십자가에서 죽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때 자신도 함께 죽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한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성찬에 참여할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을 위해 죽으신 것을 지금 기억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기억하고 자신들과 함께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들은 내가 예수님의 것이 되었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남녀가 결혼하여 이러한 관계가 형성되지 않고 단지 결혼하였다고 하는 반지만 가지고 있다면 그 결혼은 파경에 이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성찬에 참여하면서 이러한 의미를 모르고 단지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것으로 성찬에 참여하였다고 한다면 그것은 형식만 성찬일 뿐이지 내용에 있어서는 전혀 성찬이 아닙니다. 단순히 떡과 포도주라는 물질만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사실 떡과 포도주는 실제로 예수님의 살과 피가 아닌 단지 물질입니다. 그런데 이 떡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살이 되고 피가 되는 것은 위와 같은 의미를 믿음으로 받아들여 먹고 마실 때 실제적으로 성도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것과 같은 것이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에 참여하는 자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로 새우신 새 언약을 자신들의 삶속에 계속 드러내야 합니다. 새 언약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미 구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언약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로 세우셨기 때문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들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는 언약입니다. 그러니 새 언약이라고 할 때는 동물의 피가 아닌 예수님 자신의 피로 세운 언약이기에 새 언약인 것입니다. 자신의 피로 세운 것이므로 구약의 언약이 온전하게 다 이루어졌습니다. 피를 통해 세웠기 때문에 이룬 것입니다. 구약의 언약과 신약의 언약의 내용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새 언약이라고 해서 마치 구약의 옛 언약과 서로 다른 것으로 여길 수 있으나 사실 그 내용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칼빈은 구체적인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언약의 통일성이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나타났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언약의 내용이 왜 중요하냐면 지금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들과 그리고 앞으로 새로운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이 되는 자들과 자신의 피로 언약을 맺고 있는 그 모습 속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구약의 백성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하고 나서 하나님 앞에서 음식을 먹음으로 언약이 체결되었다고 하는 것을 상징하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음식을 나눈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교제하므로 유업을 이을 자들이 되었다고 하는 것을 공적으로 공포하는 것입니다. 이와 동일하게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로 새 언약을 맺고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예수님 앞에서 먹고 마시는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새로운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되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표징이었습니다.
이러한 표징을 가지고 있는 성찬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성찬이 가지고 있는 올바른 의미를 알고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예수님은 우리 눈에 보이는 육체로 계시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실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성령의 임재를 통해서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성찬에 참여할 때 우리는 성령님을 통해서 예수님 앞에서 먹고 마시는 것이 되었습니다. 즉 제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시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언약이 마침내 예수님을 통해서 다 이루어지고 성취된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방편 중에 성례, 즉 오늘 우리가 받는 성찬이 은혜의 방편이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로 이룬 구속의 은혜를 성찬을 통해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모든 은혜를 주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구속을 완성하게 하는데 필요한 모든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병자가 성찬을 받는다고 해서 병이 낫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병이 생기면 장로를 청해 기름을 바르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막연하게 성찬이 신비로운 것으로 생각하여 마치 무슨 표적이나 능력이 나타나는 것으로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성찬을 통해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억하고, 우리를 위해 살과 피를 흘리셨다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찬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부과되는 신앙의 의무가 있습니다. 먼저 성찬에 참여하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시고 살고 있기 때문에 새 언약의 내용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삶을 계속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삶은 우리의 힘으로 되어지지 않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되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찬에 참여할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새 언약 백성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력하게 촉구하고 우리를 이끄십니다. 이러한 성령의 요구에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그날 까지 이 성찬을 행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전하는 복음증거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성찬에 참여하는 자들은 단지 예수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행사적의미를 가지면 안 됩니다. 기념하고 성찬을 마치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찬을 통해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억하고 매일 매일의 삶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워지지 않는 새 언약을 새겨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자주 이 성찬을 시행할 것입니다. 그럴 때 마다 여러분들은 성찬이 단지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이 아닌, 예수님의 죽으심을 늘 기억하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자신의 삶속에서 주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고 하는 신앙의 모습을 가지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일 년에 몇 번만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의 삶 속에 계속 일어나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성찬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고 자주 시행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아멘.
옮긴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