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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그 흔한 김씨 2020. 12. 8. 22:26

성도의 교제 > 찬양과기도 > 치유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wnschurch.com)윌리암 맥도날드

 

성도의 교제 > 찬양과기도 > 치유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치유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글쓴이 : 관리자 치유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윌리암 맥도날드 “너희 가운데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부를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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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가운데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부를 것이요, 그들은 []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해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그가 죄들을 범하였을지라도 그것들을 용서받으리라. - 너희 잘못들을 서로 고백하고 너희가 병 고침을 받도록 서로를 위해 기도하라. 의로운 자의 효력 있고 뜨거운 기도는 많은 유익이 있느니라. ( 5:14-16)

 

이것은 야고보서와 신약성경 전체에 걸쳐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 중 하나일 것이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오늘날 신자의 삶 가운데서 치유의 문제를 어떤 관점으로 대해야 하는지를 숙고하게 만든다.

 

이 구절들에 관해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 성경이 질병의 문제와 치유의 문제에 관해 어떻게 교훈하고 있는지를 상고해 보는 것이 대단히 유익하다.

 

하나님의 치유

 

1. 그리스도인들은 일반적으로 모든 질병이 세상에 있는 죄의 결과라는 것에 동의한다. 

   만일 죄가 세상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질병도 세상에 없을 것이다.

 

2. 때로 질병은 어떤 사람의 삶 가운데 있는 죄의 직접적인 결과일 수 있다. 

   고린도전서 11 30절에서 우리는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 가운데 자신들의 삶 가운데 있는 죄를 판단하지 않고, 다시 말해 죄를 자백하고 버리지 않은 채 주의 만찬에 참여했기 때문에 병든 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읽을 수 있다.

 

3. 모든 질병이 어떤 사람의 삶 가운데 있는 죄의 직접적인 결과는 아니다. 

   욥은 가장 의로운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병이 들었으며( 1:18),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은 자기가 지은 죄로 인해 고통을 겪었던 것은 아니다( 9:2,3). 에바브로디도는 주님의 일에 쉬지 않고 열심이었음에도 병들었으며( 2:30), 가이오는 영적으로는 틀림없이 강건했지만 육신적으로는 그렇지 못했다(요삼 2)

 

4. 질병은 종종 사단이 역사한 결과일 수가 있다. 

   욥의 온 육체가 악창으로 덮이게 한 것은 바로 사단이었다( 2:7). 누가복음 1310-17절에 나오는 여인으로 하여금 귀신들려 앓으며 몸을 펴지 못하게 한 것도 사단이었다( 2:7). 누가복음 1310-17절에 나오는 여인으로 하여금 귀신들려 앓으며 몸을 펴지 못하게 한 것도 사단이었다. “십팔 년 동안(이 기간을 생각해 보라)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13:16).
바울은 사단으로 말미암은 육체의 연약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그것에 관해 “
내가 분량 이상으로 높임을 받지 않게 하시려고 주께서 내 육체 안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使者)를 주사 나를 치게 하셨으니(고후 12:7)라고 말했다.

 

5. 하나님께서는 질병을 치료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시며 또 치료하신다. 

   엄밀히 말해서 모든 치유는 하나님께로 말미암는 것이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들 중의 하나는 여호와 로페(너희를 치료하시는 여호와: 15:26)이다. 우리는 치료의 모든 경우에 하나님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질병을 치료하실 때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신다는 것은 성경을 볼 때 명백하다. 그분은 때로 자연적인 신체의 회복과정을 통하여 치유하신다. 하나님은 인간의 몸 안에 회복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심어놓으셨다. 의사들은 대부분의 질병이 아침이 되면 상태가 호전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나님은 종종 약을 통하여 치료하신다.

 

예를 들어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있는 병을 위하여 포도주를 조금 쓰라.(딤전 5:23)고 권면했다. 하나님은 때로 “근원적인 두려움, 복수심, 자기 자신으로만 가득한 마음, , 그리고 질병을 유발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구해주심으로써” 고쳐주신다. 또한 하나님은 내과나 외과 의사를 통해 치료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병든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드러내놓고 가르치셨다(9:12). 바울은 누가에 대해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 4:14)라고 언급했으며, 이것은 분명히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의사의 필요성을 인정한 표현이다. 하나님께서는 치료의 사역에서 의사를 사용하신다.

 

프랑스의 유명한 외과전문의인 듀보이스(Dubois)의 말처럼 “의사는 상처를 감싸고, 하나님은 그것을 치료하신다.

 

6. 하나님께서는 또한 기적적인 방법으로도 질병을 치료하신다. 

   복음서들은 이에 관한 풍부한 사례를 담고 있다. 하나님께서 대개 이와 같은 방법으로 치료하신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반대로 하나님은 결코 기적적인 방법은 사용하지 않으신다고 말하는 것도 잘못이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오늘날도 기적적인 방법으로 치료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의심케 할 만한 기록은 아무 데도 없다.

 

7.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언제나 질병을 고쳐주시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바울은 병든 드로비모를 밀레도에 남겨 두었으며, 주님은 육체의 가시를 가지고 있던 바울을 치료해 주지 않으셨다(딤전 4:20, 고후 12:7-10). 만일 질병을 고쳐 주시는 것이 항상 하나님의 뜻이라면, 사람들 중에는 전혀 늙거나 죽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8. 하나님은 모든 경우에 치료해주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치료는 우리가 그분으로부터 요구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빌립보서 2 27절에는 질병의 치료가 우리가 요구해서 받기를 기대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자비로 언급되어 있다.

 

9. 일반적인 의미로 볼 때, 치료가 “대속”(Attonement) 안에 들어있는 축복인 것은 사실이지만

   대속 안에 있는 모든 축복들이 다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몸의 구속은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 안에 포함되어 있지만 그 축복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성도들을 위해 다시 오실 때에야 비로소 임할 것이다( 8:23). 또한 그 때 우리는 완전케 될 것이며 모든 질병으로부터 최종적으로 치유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10. 질병으로부터 치유 받지 못하는 것이 곧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만약 이 말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사람이 한없이 오래 살 수 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바울, 드로비모, 그리고 가이오는 치료받지 못했지만 그들의 믿음은 역동적이며 살아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치유에 관한 성경의 나머지 교훈들이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 본 내용들과 얼마나 합당한 조화를 이루는 지를 알 수 있다. 이제 야고보서의 말씀을 살펴보자.

 

너희 가운데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장로들은 주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켜 세우시리라. 혹시 그가 죄들을 범하였을지라도 용서받으리라. 너희 잘못들을 서로 고백하고 병 고침을 받도록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라. 의로운 자의 뜨겁고 효력 있는 기도는 많은 유익이 있느니라. ( 5:14-16)

 

만약 이 구절들이 성경에 나오는 치유에 관한 유일한 구절이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이 말씀에 언급된 조건들을 만족시킬 때 삶 가운데 경험하는 모든 질병으로부터 치유를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다른 성경구절들로부터 병을 고쳐주시는 것이 항상 하나님의 뜻은 아니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야고보가 모든 종류의 질병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어떤 특별한 형태의 질병에 관해, 즉 어떤 특별한 환경의 결과로 생긴 질병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이 부분을 이해하는 열쇠는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용서받으리라”라는 말씀 안에 있다. 이 부분에서의 치료는 죄사함과 관계가 있다.

 

지역교회의 간증과 관련된 어떤 죄를 범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곧 병에 걸리게 되었으며, 자기의 병이 죄의 직접적인 결과로 온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나님께서 그를 교회의 교제 가운데로 회복시키기 위해 다루셨던 것이다. 그는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그 죄에 대해 하나님께 자백한다. 하지만 그의 죄는 교회의 공적인 간증과 관계가 있으므로 그는 장로들을 청하여 그들에게 자기의 죄를 낱낱이 고백한다. 그런 다음 장로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고 그를 위하여 기도한다. 이렇게 드려진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며, 주님은 그를 다시 일으키신다. 이것은 질병이 죄의 직접적인 결과로 주어졌으며, 그 죄가 상술된 방법대로 자백되어지고 처리되었을 때 그 병을 고쳐주시겠다는 주님이 분명한 약속이다.

 

어떤 사람은 “당신은 그 사람이 죄를 범한 것과 회개와 자백을 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고 질문할지 모른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15절 하반부의 말씀이 그의 ‘죄’와 ‘용서받은’ 사실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오직 자백의 결과로서만이 죄가 용서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요일 1:9).

 

어떤 사람은 “이 말씀은 그가 ‘죄를 지었다’고 말하지 않고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라고만 말하고 있지 않는가”라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전체의 문맥은 죄의 고백, 그리고 죄를 범한 사람의 회복과 관계가 있다.

 

너희 잘못들을 서로 고백하고 병 고침을 받도록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라”라고 이어지는 문맥을 주목해 보라. 17-18절에서 언급된 가뭄은 죄로 인해 이스라엘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이켜서 그분을 참된 하나님으로 인정했을 때 거두어졌다(왕상 18:39). 19절과 20절은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타락한 자의 회복의 문제를 분명히 다루고 있다.

 

야고보서 5 13-20절의 전체의 문맥은 하나님에 의해 약속된 치유는 죄의 결과로 인해 병을 앓고 있으며 그 죄를 장로들에게 고백한 사람에 대한 것임을 시사한다. 장로들의 책임은 그에게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여기에 언급된 기름을 야고보가 서신서를 기록할 당시의 기름이 의약품의 일종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 구절에서도 의학적인 수단으로 사용되었음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10:34). 또 다른 견해는 기름이 하나의 의식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주의 이름으로”라는 말씀에 의해 뒷받침된다. 다시 말해서 기름을 바르는 행동은 주님의 권위에 의해 그리고 그분의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행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기름은 때로 기적적인 방법으로 병을 치유하는 능력을 행할 때 사도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6:13). 병을 치유하는 능력은 기름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기름은 하나님의 치유의 사역에 있어서 성령님을 상징하는 것이었다(고전 12:9).

 

어떤 사람은 기름의 의식적인 사용이 은혜시대, 특히 의식이나 예식에 대해 중요성을 덜 부여하는 은혜시대의 일반적인 가치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과 보혈의 상징으로서 떡과 포도주를 사용하며, 침례식 때에는 물을 사용한다. 그렇다면 기름의 의식적인 사용을 왜 반대해야 하는가?

 

믿음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께서는 병든 자를 치료하실 것이다. 믿음의 기도라 함은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에 기초를 둔 기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장로들이 얼마나 큰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혹은 병든 자가 얼마나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하는 문제와는 별개이다. 장로들은 앞에서 언급된 조건들이 완전히 충족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일으키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온전한 확신 가운데 기도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요약해서 말한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이 죄의 직접적인 결과로써 병에 걸렸을 때 방금 말한 14-15절 말씀을 적용할 수 있다고 믿는다. 죄를 범한 사람이 자기의 죄로 인해 병이 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회개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 그들에게 자기의 모든 죄를 고백해야 한다. 그런 다음 장로들은 주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고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들은 믿음으로 그 사람이 병 낫기를 기도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그를 고쳐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너희 잘못들을 서로 고백하고 병 고침을 받도록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라.( 5:16).
이 말씀을 피상적으로 대하면 마치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우리의 숨은 모든 죄에 관해 말해야 한다는 인상을 받기 쉽다. 하지만 이 말씀은 전혀 그런 뜻이 아니다. 야고보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지었을 때 곧 우리가 잘못한 그 사람에게 찾아가서 그 죄에 대해 고백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서로 기도해야” 한다. 다른 사람에 대한 혐의를 품고 있거나 악감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도록 허락하지 말고 우리는 고백과 기도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교제의 관계를 늘 유지해야 한다.

 

육체적인 치유는 영적인 회복과 연관되어 있다. 야고보가 고백과 기도를 치유와 어떻게 연관시키고 있는지를 주목해 보라. 영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 사이에는 긴밀한 관계로 연결된 친밀함이 분명히 존재한다. 인간은 영과 혼, 그리고 몸, 이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존재이다(살전 5:23). 이 세 부분 중에서 어느 한 부분은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구약시대에 제사장은 의사이기도 했다. 예를 들면 문둥병을 진단하는 사람도 제사장이었으며, 문둥병이 치유되었다고 선언하는 사람도 제사장이었다. 제사장으로서의 임무와 의사로서의 임무를 이와 같이 한 사람 안에 두심으로써 주님께서는 영과 육 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가르쳐주셨다.

 

정신신체의학(Psychosomatic medicine)의 분야는 이러한 관계를 인정하고 육체적인 질병을 가져온 환자의 개인적인 문제점을 찾는데 역점을 둔다. 죄와 수치, 죄의 권세와 형벌로부터의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을 근거로, 또한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그 죄를 고백함으로써만이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종종 질병이 탐욕, 염려, 분노, 용서치 않는 마음, 무절제한 생활, 시기, 이기심, 그리고 교만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한다. 삶 가운데 있는 범죄는 질병뿐만 아니라 때로는 죽음도 가져온다(고전 11:30). 우리는 죄가 우리의 삶 가운데 들어왔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즉시 그 죄를 자백하고 버려야만 한다. 모든 죄는 남김없이 하나님께 고백되어져야 한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지은 죄도 당사자를 찾아가서 고백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영적인 건강과 육체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다.
(출처: 월간 횃불 6월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