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과학교육
세상을 바꾼 해상시계
그 흔한 김씨
2020. 1. 22. 10:52
김성윤 소통3기 밴드에서 펌 2020. 1. 22
1707년 10월22일
갑자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배가 세차게 흔들리더니 곳 '우지끈'하면서 배가 갈라졌다.
영국 남서부 해안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실리 제도 근처 암초에 부딪힌 배 한척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얼마 후에 같은 자리에서 세척의 배가 더 난파되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그 밤에 거의 2천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들은 갑자기 튀어나온 암초가 전혀 아닌, 암초를 향해 가고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는 사실을 원망을 하며 죽어갔다.
그들은 갑자기 튀어나온 암초가 전혀 아닌, 암초를 향해 가고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는 사실을 원망을 하며 죽어갔다.
이렇게 숱한 뱃사람이 목숨을 잃을 수 밖에 없던 까닭은, 길을 잃고서도 그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배의 위치를 정확히 측정할 방법이 없었던 시대에는 많은 배들이 그렇게 가라앉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목숨을 잃었다.
바다에서 배 위치를 알려면,위도와 경도를 알아야 한다.
안타깝게 1707년에는 육지든, 바다에서든 믿을 수 있을 만큼 정확한 시계가 없었다.
경도 문제를 푼 나라는 바다를 지배할 수가 있었고,
그렇게 되면 해상 무역을 지배해서 엄청난 부를 쌓을 수도 있었다.
실리제도에서 영국의 배들이 가라앉은 지 7년 후에,
영국 의회는 경도법을 제정했다.
그리고 '실용적이고 편리한 경도 측정법'을 내 놓는 사람에게 20,000파운드(지금 우리 나라 돈으로 최소 140억원) 상금을 주기로 했다.
제안된 방법들을 심사하기 위하여 과학자, 수학자, 천문학자들로 이루어진 심사국도 설립되었다.
제안된 방법들을 심사하기 위하여 과학자, 수학자, 천문학자들로 이루어진 심사국도 설립되었다.
드디어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신의 시계로 달과 항성들 간의 거리 이용법, 까치발 시계와 멍멍 시계 등등 말도 안되는 시계가 나왔다.
경도상이 만들어졌을 당시에, 존 해리슨은 스물한 살이었다.
신의 시계로 달과 항성들 간의 거리 이용법, 까치발 시계와 멍멍 시계 등등 말도 안되는 시계가 나왔다.
경도상이 만들어졌을 당시에, 존 해리슨은 스물한 살이었다.
* 존 해리슨
존은 헐이라는 번창한 항구 근처, 배로우에 살고 있기 때문에,
바다가 얼마나 위험한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소년 시절, 존은 교회에서 종치기로 일했다.
소년 시절, 존은 교회에서 종치기로 일했다.
그러다가 소리의 음을 잘 구별한다는 것이 알려지자 교회의 종을 조율하는 일을 하게 되고,
이웃 마을의 교회종까지 맡게 되었다.
하지만 종치는 일은 취미였고, 진짜 직업은 아버지가 그러하듯, 목수였다.
그는 나무에 관해서 아는 것이 많았고, 간단하게 수학도 알고 있었다.
학교에서 배운게 아니라 모두 일하면서 혼자 터득한 것이었다.
존은 모든 원리를 하나하나 스스로 확인해 보았다.
존 해리슨은 종과 진자 시계가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존은 모든 원리를 하나하나 스스로 확인해 보았다.
존 해리슨은 종과 진자 시계가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자 운동으로 시계가 가듯 흔들리는 종 역시 시간을 알려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후 여러 시계를 만들게 되었고 1735년 수천시간에 걸쳐서 나무를 세심하게 잘라내고,
금속 조각들을 꼼꼼히 잘라 붙이는 작업을 한 끝에, 존 해리슨은 첫번째 해상 시계를 완성하였다.
이 시계가 바로 H1이다.
* H1
그 시계를 왕립학회 학자들에게 보여 주자, 학자들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 봤다.
H1은 다른 시계와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겨우 6cm의 높이에, 무게 또한 34kg 밖에 안되는 H1은 놋쇠막대들과 이상한 나선형 용수철, 손잡이, 공, 기이한 작은 용수철들 등으로 빛나고 있었다.
일년 뒤 경도 심사국은 존 해리슨이 시계를 가지고, 포루투갈 리스본으로 시험 항해를 떠나게 해주었다.
항해하는 내내 그 시계는 거의 1초 조차 틀리지 않았다.
이 실험으로 인정을 받았고, 경도 심사국은 지난 20여년 넘게 한번도 열리지 않은 회의를 소집했다.
존 해리슨은 런던으로 이사를 한 후 두번째 해상시계를 만들면서 2년을 보냈다.
존 해리슨은 런던으로 이사를 한 후 두번째 해상시계를 만들면서 2년을 보냈다.
그것이 H2이다.
그 뒤 존 해리슨은 세번째 해상시계 H3을 구상하고 20여년을 보냈다.
시간은 존 해리슨 자신에게도 큰 문제였다.
예순 살이 된 그는 H3까지 만드느라 몹시 지쳐 있었다.
그때 시간이 정확한 몸시계를 만든다면, 배 위에서도 쓸 수 있지 않을까?
그때 시간이 정확한 몸시계를 만든다면, 배 위에서도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 할 수록, 존 해리슨은 점점 더 가능성에 대해서 획신이 생겼다.
그렇게 H4가 만들어지고 난 후 H5가 다시 완성된다.
통풍으로 고생하고 있는데다, 시력도 점차 나빠지고 있었다.
그 시계는 경도법이 요구한 사항들을 모두 충족시켰지만, 경도 심사국은 그에게 상을 주지 않으려 했다.
1773년 6월 21일, 결국 존 해리슨이 남은 상금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법령이 발표가 되었다.
79세 생일을 앞둔 존 해리슨은 글자판이나 콫무닉도 없는 시계를 민들게 되었다.
통풍으로 고생하고 있는데다, 시력도 점차 나빠지고 있었다.
그 시계는 경도법이 요구한 사항들을 모두 충족시켰지만, 경도 심사국은 그에게 상을 주지 않으려 했다.
1773년 6월 21일, 결국 존 해리슨이 남은 상금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법령이 발표가 되었다.
* 존 헤리슨 수상 장면
그 시계 덕분에 제임스 쿡 선장같은 위대한 탐험가들이 전 세계의 바다를 누비며 돌아 다니면서도 경도를
알 수 있었다.
영국이 바다를 지배하도록 해,
영국이 바다를 지배하도록 해,
마침내 대영 제국이 탄생토록 이끈 것은,
별 밖에 모르는 대학의 천문학자들이 내세웠던 천체시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시골뜨기 한 목수가 만든 시계였다.
대학 근처에도 못 가 본 종치기이자,
나무와 운동 법칙과 종 다루는 법을 아는 목수이자,
발명가이자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계장이로 평생을 바친 한 사람이 만든 시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