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교육정책
일본을 대하는 법
그 흔한 김씨
2019. 8. 25. 19:38


세계에서 일본을 무시하는 것은 한국 사람들 뿐이라는 얘기가 있다.
실제로 유럽인들은 일본사회를 약간 이상하게는 봐도 무시하지는 않으며, 중국인들은 아주 미워하면서도 그렇다고 깔보지는 않는다. 내가 20여년 전 일본유학을 떠난다고 하니 친척어른들은 “일본 역사(간혹 왜X 역사라고 하는 분들도)에서 뭘 배울 게 있다고 유학을 가도 하필…” 하며 혀를 끌끌 찼다. 거기다 대고 나는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해봤지만 그다지 효과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일본과 한국의 격차는 컸다.
당시 일본과 한국의 격차는 컸다.
‘왜X’ 운운하는 친척어른들도 “물건은 일제가 최고”라며 도시바 선풍기 앞을 떠날 줄 몰랐고, 백화점이나 다리가 무너지자 “왜X들이 일제 때 만든 건 지금도 끄떡없어!” 하며 갑자기 일본 대변인이 되어 버리곤 했다. 일본에 관광 온 한국인들은 아키하바라에서 최신 전자제품을 사느라 여념이 없었고, 우리와 달라도 너무 다른 거리의 질서와 청결에 뱉으려던 침을 도로 삼키던 시절이었다. 방송들은 일본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베껴대면서도 입만 열면 반일, 반일했고, 독립지사 같은 신문기자들의 입에서도 ‘요코(가로), 다테(세로)’, ‘미다시(제목)’, ‘사쓰마와리(경찰서 출입)’ 같은, 일반시민들은 모르는 일제(日製) 전문용어가 술술 튀어나왔다.
내가 1990년대 유학생으로 나리타에 내린 날은 곱디고운 보슬비가 내렸다.
내가 1990년대 유학생으로 나리타에 내린 날은 곱디고운 보슬비가 내렸다.
거기서 리무진버스를 타고 유학생기숙사에 가는 내내 맘이 편치 않았다. 기숙사로 가는 차창 밖에 펼쳐진 ‘선진국’의 모습을 내다보며, 일제치하에서 <민족개조론>을 쓴 이광수, 그리고 1970년대 초에 일본을 맞닥뜨린 김윤식 선생(<내가 읽고 만난 일본>, 그린비)의 심사를 어지럽혔던 ‘격차의 벽’이 떠올랐다. 나도 그 연장선상에 어쩌다 서버렸음을 직감했다.
그런데 지난 20년간 믿기 힘든 일들이 벌어졌다.
그런데 지난 20년간 믿기 힘든 일들이 벌어졌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방면에서 한국이 일본의 턱밑까지 쫓아간 것이다. 1997년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던 날에는 일본 최고의 앵커 즈쿠시 데츠야가 명동성당 앞에서 “긴다이츄(김대중의 이름은 이 일본 발음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믿기십니까?”라며 한국 민주주의의 역동성에 찬사를 보내고 일본 정치를 맹비난했다. 아시안게임에서도 올림픽에서도 일본을 제쳤다. 나는 지난 3년간 세 번에 걸쳐 일본 도쿄대, 와세다대, 중국 푸단대(復旦大)와 함께 ‘한중일 청년역사가 세미나’를 개최해왔다. 동아시아사를 전공하는 40세 전후의 젊은 역사학자들의 학문적 교류를 위한 것이었다. 내가 공부를 시작했던 80~90년대 동양사의 최고봉은 일본이었고, 나는 그 거대한 벽 앞에서 숨이 가빴다. 그러나 이 세미나들에 제출된 우리 측 논문들은 일본 측 논문에 전혀 손색이 없었다.
그동안의 분투 덕분에 요즘 젊은이들은 일본 콤플렉스가 거의 없는 거 같다.
그동안의 분투 덕분에 요즘 젊은이들은 일본 콤플렉스가 거의 없는 거 같다.
학생들에게 우리가 일본과 대등하다고 생각하느냐 하면 대부분 당연한 걸 왜 묻나하는 반응이다. 격세지감, 천지개벽이다.
그러나 나는 불안하다.
그러나 나는 불안하다.
우리가 일본을 너무 일찍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 우리사회의 중추인 50~60대는 일본과 가장 격절된 세대이다. 이들은 일제를 경험한 윗세대나, 일본문화를 통해 일본사회를 줄곧 접해온 젊은 세대와 비교할 때 일본을 잘 모르는 세대에 속한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미국박사학위 소지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이 세대 오피니언 리더들과 얘기해보면, 미국이 보는 시각으로 일본을 내려다본다는 느낌을 자주 받곤 한다. 이런 것이 영향을 끼쳐서일까? 일본은 한물 간 나라라고 공공연하게 말하는 학자가 있는가 하면, 일본사 수업에서도 일본어 텍스트 수업이 불가능할 정도로 일본어는 ‘변방어’가 되어 버렸다.
우리는 아직, 도전자의 자세로 일본을 더 알아야 한다.
우리는 아직, 도전자의 자세로 일본을 더 알아야 한다.
알아도 샅샅이 알아야 한다. 일본이 무서워하는 나라는 큰소리 치는 나라가 아니다. 서울 지하철 젊은 여성의 손에 도쿠가와 시대 역사서가 들려 있고, 하루키뿐만 아니라 나쓰메 소세키도 베스트셀러가 되며, 중년 남성들의 술집 대화에서 메이지유신 지도자 이름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튀어나오고, 학교에서 한국침략의 원흉으로서의 이토 히로부미 만이 아니라, 그런 자가 어떻게 근대일본의 헌법과 정당정치의 아버지로 평가되는지, 그 불편함과 복잡성에 대해 파헤치는 그런 한국을, 일본은 정말 두려워 할 것이다. 화풀이만으로는 일본을 이길 수 없다. 물론 화가 나니 화도 풀어야 한다. 그러나 정말 극일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면, 일본에 대한 우리사회의 공부와 식견은 좀 더 높아져야 한다. 여기에는 왕도가 없다. 돋보기 들고 차근차근, 엉덩이 붙이고 끈덕지게 공부, 또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세계인 모두가 일본을 존경해도 우리는 그럴 수 없다. 동시에 세계인 모두가 일본을 무시해도 우리만은 무시해선 안 된다.



- 박훈 서울대 교수 동아시아사 [역사와 현실] 경향신문 2017.08.23 오전 10: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