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주기도문(마6:9-15)
주기도문(마6:9-15)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 오늘날 우리에게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주옵시고 •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 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오늘날 기독교인들 가운데 주기도문을 외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예배 시간이나 집회가 있을 때마다 자주 주기도문을 암송하며 함께 왼다. 그렇다면 주기도문이란 무엇인가P 주기도문은 과연 교회의 성도들이 암송하거나 예배시간에 함께 외도록 주신 기도문인가? 우리는 언제부터 주기도문이 교회에서 공적으로 암송되기 시작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그것이 교회의 기도에 대한 지침과 기준이 될 뿐 아니라 초대교회 때부터 교회적 고백이 되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기도문이 무엇인가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해야 한다. 그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한채 아무리 외어 봐야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자칫 잘못하면 그것은 마치 이방 종교인들이주문을 외듯이 하는 것 밖에 안될 우려 마저 있다. 주님께서 열두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신 것은 그이후에 설립 될 교회에게 가르치신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우선 분명히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주님께서 그 기도를 가르치신 목적은 제지들이 그 기도문을 암송하도록 주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비롯한 이후 모든 교회의 기도는 주님께서 가르치신 그 기도에 포함되어 있어야 함을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기도문을 구속사적 경륜 가운데서 이해 해야만 한다. 즉 주기도문을 단편적으로 이해하거나 개별화하여 적용하려 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의 모든 기도 내용은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와 조화 되어야 한다.
이제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내용을 살펴보자 주기도문 서두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말씀에는 하나님에 대한 성도의 관계적 고백이 담겨 있다. ‘하늘에계신’ 이라는 문구에서 우리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현재적 존재를 보게 된다. 우리의 하나님은피조 세계인 이 세상에 존재 하시는 분이 아니라 원상(천상)의 곳에 존재하고 계신다.
물론 그 하늘은 우리가 쳐다보는 피조 세계의 공간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원래부터 존재하는 천상의 나라를 지칭한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그 천상의 보좌에 존재해 계신다. 천상의 하나님과 그의 백성사이에 부자 관계가 확인됨으로써 그의 백성은 하늘과 직접 연결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에서 ‘우리’ 라는 말은 열두 제자를 직접 지칭하고 있으며 그 이후 교회 가운데 존재 하게 될 주님의 백성을 총괄하여 그 안에 두고 있다.
여기서 고백되고 있는 ‘아버지’라는 말은 매우 중요하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교회와 성도들의 아버지로 말씀 하시면서 하나님의 모든 자녀는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자들임을 가르치고 계신다. 이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된 관계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라는 한 마디에 하나님의 백성의 소속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늘(heaven)임을 명백히 확인해 주고 있다.
“오직 우리 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골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3:20).
또한 이 말씀 가운데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들의 존재에 대한 심판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는아버지이신 하나님으로 인해 하나로 결속되는 교회와 하나님과 무관한 그 밖의 인간들에 대해 말씀하고있는 것이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는 말씀 속에서 그 ‘이름’ 은 우리로 하여금 경외감을 가지게 한다.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하신 존재의 표상으로 더러운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다. 죄악이 가득 찬 인간의 더러운 입술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고백할 수 있다는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하나님의 ‘거룩성’은 범죄한 인간의 모습과 완전히 대비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기도문의 맨 처음 부분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깨닫게 되며 주님께서 허락하신 우리의고백이 얼마나 놀라운가 하는 점을 알게 된다.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진 인간이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그의 거룩함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결코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더러운 인간이 직접 하나님의 거룩함을 언급하거나 노래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자녀가 된 우리는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룩함을 고백하며 노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0절 말씀에 기록된 내용은 매우 중요한 구속사적 개념을 띠고 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리다’ (10절).
여기서 ‘나라이 임하옵시며’ 는 고어로서 ‘나라가 임하옵시며’ 라는 뜻이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라가 임하옵시며’ 라고 기도 하도록 가르치신 의도는 무엇일까? 어떤 사람들은 그 나라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가르치신 기도이며 십자가와 부활사역 이후에는 그 나라가 이미 도래했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기도할 것은 아니라고 하기도 한다. 과연 그런가?
우리는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 구약의 나라 곧 왕국의 개념을 잘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땅과 자손을 약속하시고 모세 이후 율법을 주신 후 다윗 왕을 통해 특별한 왕국을 허락하신 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특별한 왕국이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함을 보여주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왕국을 위해 이 땅에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로 말미암은 나라를 세워 친히 통치하고 계신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 나라의 임함에 소망을 두고 기도하게 하셨다.그 나라는 세상의 다양한 나라들과는 다른 하늘로부터 세워진 나라이다. 그러므로 천상으로 말미암은 그 나라는 세상 사람들이 지상에 세운 모든 나라들과는 대치 관계에 놓이게 된다. 세상은 인간이 타락한 이후 사탄에게 넘겨준바 된영역이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쫓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입 2:2),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그의 나라를 세우신 것은 사실상 세상 나라와 전투를 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에 침범하여 공중 권세를 잡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택하신 자녀들을 장악하고 있는 사탄을 심판하시기 위해 그의 나라를 세우신 것이다. 즉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 나라의 포로로 잡혀 신음하고 있는 터에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나리를 세워 전쟁을 통해 자기 백성을 되찾아 오기를 원하신 것이다. 여기서 나라의 임함은 세상 나라와의 일전을 앞둔 긴장 관계 속에서 이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의 교회 역시 하나님의 왕국의 기능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다. 예수님을 교회의 왕으로 모시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왕국을 형성하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이 세상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속해 있으면서 사탄과 대치하고 있는 백성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하늘에서는 이미 그 뜻이 이루어진 상태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그 뜻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이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역시 세상과 생명을 건 한 바탕 전투를 치러야 한다. 우리는 성경의 많은 곳에서,특히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엄청난 전쟁이 발생하는 모습을 생생히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하늘에서 뜻이 이루어 졌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할까? 필자는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이해한다. 하나님께서 계시는 천상에는 이미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이 이루어져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서l상에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대적하는 세력들이 악을 도모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녀들은 그 가운데 신음하고 있는 것이다.
사탄의 유혹으로 인해 인간이 범죄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은 파괴된 상태에 놓여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천상에 존재하는 그 영광을 회복 하시기를 원하신다. 교회의 소망은 죄악 세상에 빠져있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을 불러 모아 그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11절에서는양식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 11 절)
여기서 말하는 ‘우리’가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과 교회라는 점에 대해서는 여전히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은 예수님 당시를 포함하는 이 세상의 모든 때를 의미한다. 즉 아직 회복이 완성되지 않아 세상 나라와 대치 관계에 있는 긴장된 시기인 것이다. 지상의 교회와 성도들은 항상 그런형편에 놓여 실아 가고 있다. 그런 긴장된 상황에 처한 교회와 성도들에게 하나님께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신다. 그것은 과연 무슨 의미인가?
현대의 풍요로운 세계에 살고 있는 많은 교인들은 이 말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의미 없이 되풀이하여 암송하는 것을 보게 된다. 오늘 한국 교회의 절대 다수의 교인들은 날마다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아도 될 만큼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집에 쌀이 있으며 양식을 살 만한 돈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렇게 기도해야 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릴 만한 형편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를 하도록 권했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올바른 설명이 아니다. 당시에도 집안에 양식이 풍족한사람들이 얼마든지 많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 말씀이 양식이 없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말씀이라고 한다면 옳지 않으며 전반적으로 가난한 시대의 교회에 주어진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이 말씀은 모든 시대 모든 교회에공히 주어진 말씀이다. 가난하건 부유하건 관계없이 누구나 받아들여 기도해야 할 내용인 것이다. 또한 이 말씀이 실제로 먹는 음식이 아니라 영적인 양식을 의미한다고 말하는 것도 올바른 해석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말씀의 본질적인 의미는 성도의 생명은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양식’ 은 생명을 보존하는 방편이 된다. 음식을 먹지 않고 이 세상을 살아갈 자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가난한 성도이건 부유한 성도이건 동일한 고백가운데서 자기의 생명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고백하며 하나님께서 양식을 허락하시지 않으면 결코 생존할 수 없는 존재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도록 기도하라는 것은 생명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과 하나님 에 대해 적대적인 세상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돌보아 주실 것을 간구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또한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도록 기도하라고 하신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12절).
이 말씀의 의미가 조건부 용서를 말하고 있는 것일까? 즉 우리가 그렇게 했으니 주님도 우리 에게 그렇게 해 달리는 말인가? 우리가 우리에게 범죄한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 해 주었으니 하나님께서도 우리죄를 용서해 달라고 요구 하라는 말이 아님은 분명하다. 여기서 말하는 타인에 대한 우리의 용서가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용서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 가르침을 통해 주님께서 교회 즉 성도의 삶을 말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주님께서 여기서 말씀 하시고자 한 것은 죄의 문제는 죄를 지은 자가 아니라 범죄로 인해 ‘피해를 입은 그 상대방에 의해 해결’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즉 죄를 지은자의 편에서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그것을 용서할 때 ‘ 비로소 그 죄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범죄 문제도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께서 그것을 해결 하실 수 있다. 인간의 범죄로 인해 그 영광을 파괴당한 하나님께서 그 죄를 용서하고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가장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부분은 하나님께 그 죄의 용서를 구할 수 있는 존재는 ‘우리’ 곧 예수그리스도의 열두 제자와 그 이후에 설립될 교회라는 점이다.
또한 이 구절에서 우리는 보복하지 않는 성도의 삶을 배경으로 하여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앞에서 우리는 동해보복에 관한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율법에 동해보복을 규정하고 있으므로 누구든지 자기에게 범죄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보복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말씀 가운데서는 저들에게 죄지은 자에 대해 동해보복을 하지 않고 용서해 주는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사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피해를 당한 입장에서 조건 없이 용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율법의 기록이 그렇게 되어 있으니 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위해 그렇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그렇게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점을 기억케 하시면서 하나님께서도 그와 같이용서해 주시도록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일상 생활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행될 수 있는 용서이다. 아마 지금 산상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열두 제자들은 과거에 그런 식으로 죄지은 자들을 용서해준 경험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제자들에게뿐 아니라 주님의 몸 된 교회에 하시는 말씀이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13절).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도록 악에서 구해 달라는 기도를 하라고 하신다. 여기서 말하는 시험이란 유혹(temtation)이며, 악은 곧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이다. 악한 세상이 곧 성도에게는 유혹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 지라도 죄악 세상에 태어나서 죄에 익숙하게 되어 있음으로 늘 유혹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의 유혹을 항상 견제하며 하나님께 의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혹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말하는 유혹이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류의 유혹 이상의의미를 지닌다. 물질의 유혹, 성적인 유혹, 거짓말하고 싶은 유혹 등 수많은 유혹이 있다. 물론 그런 것들은 유혹에 속한다. 그러나 그런 유혹들은 우리가 쉽게 분별해 낼 수 있는 유혹이다. 즉 누가 봐도 그것은 잘못이라 할만한 것들이다.
그렇지만 정말 위험한 유혹은 다른 사람들이 별로 위험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들이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복이라 생각하는 그런 것들이 도리어 유혹일수 있다. 이 세상에서 건강하고 물질적 풍요를누리며 많은 교육을 받아 남들로부터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랑이나 복이 아니라 도리어 유혹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혹 세상의 풍요로움에 빠져 인생을 누리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며 복이라 말하지는 않는가?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세상을 영원히 살수 있는 공간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죄악 된 이 세상은 잠시지나가는 것이며 성도들에게는 영원한 천국이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세상에서 복을 받아 잘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도리어 죄악 된 세상의 의미를 해석하며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는 것이다. 참 성도들은이 세상에 아무런 미련을 두지 않는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건강하고 부유하며 남으로부터 부러움이 될 만한 것들을 많이 가지게 되면 이 세상에 미련을 가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 세상을 탐닉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죄악 된 이 세상이살 만한 의미가 충분한 공간으로 인식되기 시작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복이 아니라 도리어 조심 해야 할 유혹이 된다. 그러므로 나라와 권세와 영광’ 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며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에서 누릴만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있지 않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주기도문을 가르치신 후 다시금 교회의 기초가 되는 열두 제자들인 ‘너희’ 와 하나님의 관계를 말씀하고 계신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전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사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14, 15절).
여기서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 하신다’ 고 말씀하신다. 이는 용서에 대한 조건을 말하고 있지만 그 조건을 단순하게 생각 할 것이 아니라 그 저변의 의미를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직 구체적으로 누구를 용서해야 할지 모르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 이스라엘 민족 지도자들이 얼마나 많은 과실을 범하게 될지 감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문을 가르치신 후 용서에 관해 말씀하고 계신다.
이 말씀은 너희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의 과실에 매달려 그것에 대한 문제 해결이나 잘, 잘못을 가리는 것을 목적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온전히 붙어있으라는 말로 이해된다. 즉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처럼 자기 중심적 신앙 활동을 하는 자가 되지 말라며 당부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용서는 일반적 의미에서 이야기하는 용서이며 죄에 대한 용서를 전반적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다. 즉너희’ 의 용서는 일반적인 용서이며 하나님의 용서는 죄에 대한 영원한 용서임을 말하는 것이다.
나중 예수님께서 유대인들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유대인들과 로마제국의 군대에게 저항하지 않았다. 이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대한 구체적인 심판을 교회에 맡기지 않으셨다. 물론 교회는 세상에 대한 심판을 끊임없이 선포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 심판함으로써 그에 직접 대항하지는 않은 것이다.
완전한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들의 모진 고난 가운데서도 성부 하나님께 그심판을 맡기셨으며 직접 심판을 하지 않으셨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도록 요구했으되 그는 그렇게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는 오늘 우리 시대의 교회 역시 그와 동일하다. 주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시는 용서는 바로 그런 의미이다.
이광호 목사